일본의 불안한 정치ㆍ경제 상황을 둘러싸고 떠돌던 ‘3월 위기설’이 현실이 됐다.
예기치 못한 규모 9.0의 대지진과 쓰나미, 화산 분출 등 자연재해가 일본 열도를 덮치면서 당초 3월 위기설의 주범이었던 정국 혼란은 자취를 감췄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욕구가 초라하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폐허로 변한 재해현장 복구는 물론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자연재해와의 사투가 기다리고 있다. 이는 가뜩이나 선진국 가운데 최악인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로 고전하는 일본을 암흑천지로 몰아넣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대지진이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겠지만 재해복구 비용이 이미 위험 수위에 있는 일본의 국가 부채를 한층 더 늘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대지진 피해 한정적 = 1995년 1월 한신 아와지 대지진 이른바 ‘한신대지진’ 당시, 일본 국내총생산(GDP)은 2% 감소했다 이후 회복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번 동북지방의 대지진으로 인한 타격이 한신대지진 수준을 넘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일각에서는 GDP의 1%가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강하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현재의 일본 경제가 당시보다 훨씬 취약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선진국 가운데 국가부채 수준이 가장 높은데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을 포함해 앞으로 피해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서는 일본 경제가 올 1분기에는 위축되겠지만 올해 안에는 반드시 회복 기조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관측이 대세다.
이번 대지진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서는 일본이 세계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것이 아닌만큼 중동ㆍ아프리카 정세에 따른 유가 급등이 여전히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피어폰트증권의 스테판 스탠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경제는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하는 한편, 미국 채권운용사인 퍼시픽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 컴퍼니의 모하메드 엘 에리언 공동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일본 경제에 대해 “GDP는 일단 침체되겠지만 이후 경기 부양 수요에 힘입어 경제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널리스트들에 따르면 한신대지진의 경우에 비춰볼 때 GDP 성장률은 2분기부터 3분기까지 연율 3%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 대재앙 복구로 인한 국가부채가 문제 = 문제는 이번 강진이 이미 위험 수위에 차 있는 국가 부채를 한층 더 늘릴 수 있다는 점이다.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지진 재해는 최악의 시기에 일어났다”며 “복구 비용 대부분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최종적으로는 중앙 정부가 부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재무상은 동북부를 강타한 지진 피해자 구조활동을 우선 추진하기 위해 2010년도 예산의 예비비 잔여분인 2038억엔을 활용할 방침을 밝혔다.
이번 지진 피해 대책 재원 규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나 1995년 한신대지진 당시에는 총 3조2298억엔이 복구 관련 비용으로 계상됐다.
미쓰비시UFJ증권 인터내셔널의 브랜든 브라운 이코노미스트는 “복구와 관련한 채무 비용으로 국가부채는 GDP 대비 2~10% 가량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5% 이상 증가할 경우 일본 정부가 국채 추가 발행이 아닌, 외환보유고에 손을 대 미 국채를 매각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공공부채 증가는 국가 신용등급의 추가 강등을 초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 1월 일본의 국가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고, 무디스는 경제ㆍ재정정책이 국가 부채의 급증을 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이지 않다며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변경했다.
◆ 엔고 또 고개 = 동북지방에서의 강진 발생 직후 엔화는 달러에 대해 일단 약세를 나타냈지만 엔 캐리 트레이드(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것) 자금이 대규모로 청산되면서 본국으로 송환되는 ‘리패트리에이션(Repatriation)’ 현상으로 달러당 81엔대로 상승했다.
업계에서는 당분간 보험사나 기업들의 리패트리에이션 규모에 좌우되겠지만 엔화 값은 한층 더 강세를 나타낼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행(BOJ)은 금융시장의 안정 및 자금 결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일본은행은 재해지역 금융기관들 대부분이 휴일 영업에 들어간 12, 13일 2일간 13개 금융기관에 총 550억엔의 현금을 공급했다고 밝혔다.
일본은행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14일에도 수조 엔을 시장에 긴급 방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행이 이런 식으로 긴급 자금을 방출하는 것은 그리스 채무 위기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았던 지난해 5월 이후 처음이다.
당시 일본은행은 시장 개장일 기준으로 2일 연속 하루 2조엔씩을 시장에 긴급 방출했다.
씨티그룹의 애널리스트들은 “외환시장은 금융, 재정면에서의 긴급 대응으로 시세의 방향성을 잡으려 할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UBS매크로리서치의 만수르 모히 우딘 환율 전략 책임자는 “일본은행은 엔고 억제를 위해 시장개입을 단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엔화가 또 사상최고치에 근접할 경우 가뜩이나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산업계에 치명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도요타, 혼다, 닛산, 소니 등 주요 자동차 업체와 전자업체들은 지진으로 일부 조업을 중단했으며, 원전과 화력 발전소 및 정유시설도 화재 등 지진에 따른 피해를 입고 가동을 중단하면서 전력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