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정부의 시장개입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면서 금융권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민간 중시, 관료 배제’의 국정 슬로건에 숨죽이던 ‘관치’(官治)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현 정부 들어 직간접적으로 금융권에 압력을 가하는 신관치 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의 시장개입 논리는 금융위기 이후 시장 논리보다 항상 앞서고 있다. 특히 미소금융 기부금으로 기업에 손을 벌리고 부실 저축은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지주사에 인수를 권유하는 등 정부의 금융시장 개입 노골화는 ‘70~80년대 관치금융’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적잖다.
지난해 은행권이 출시한 새희망홀씨 대출이 대표적 사례다. 은행 영업이익액의 일정 부분만큼을 그동안 은행이 외면해왔던 저신용 서민들에게 지원한다는 명분의 금융상품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발적 합의가 아니라 강압에 가까운 정부의 노골적 요청에 굴복한 결과물이다.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서민정책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준표 의원이 영업이익의 10% 이상을 서민계층에 대출하지 않는 은행에 미달금액의 절반을 과징금으로 부과하는 법안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이를 피하기 위해 내놓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올해 금융권 최고 이슈인 부실 저축은행 문제도 마찮가지다. 금융당국의 압박에 금융지주사들이 ‘자의반 타의반’ 저축은행 인수를 추진하거나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또 공적자금이 가져올 정치적 파장 때문에 은행 등이 적립한 돈으로 공적자금을 대신하겠다는 것은 관치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라는 지적이다.
금융공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심판(관)들의 역할은 경기운영의 묘를 살려 좋은 경기를 만드는 것”이라면서 “지금은 심판들이 더 좋은 경기를 만들 수 있다며 수시로 룰을 바꾸는 격”이라고 최근 상황을 빗대 말했다.
이에 따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금융개혁위원회 안을 중심으로 한국은행과 금융감독당국의 자율성과 중립성, 독립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금융감독체계를 개편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금융감독위원회가 감독정책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지만 한국은행은 독립성을 비교적 보장받는 형식으로 정착됐다. 또 금융권에서도 정부의 간섭이 최소화되고 인사권은 자체 인사추천위원회를 거쳐 임명하는 식으로 바뀌어갔다.
문제는 IMF 경제위기 당시 한국의 금융정책을 좌지우지 했던 인물들이 다시 화려하게 복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경제를 총괄하는 수장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당시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으로 금융정책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금융감독당국의 수장인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재정경제원 외화자금과장으로 재직하며 외환관리의 최일선에 있었던 주역이다. 우리나라 통화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재정경제원 장관 특보로 재직하며 IMF를 겪었다.
이에 금융권 안팎에선 금융산업 전반에 ‘관치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국회 정무위원회 야4당 정무위원들은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이 될 게 불 보듯 뻔하다”면서 “한국 경제는 퇴행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신 관치금융으로의 회귀는 당장 2008년 상반기 환율사태와 같은 부작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2008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7% 성장을 만들기 위해 원화가치를 떨어뜨리는 등 실질적인 관치를 시작했지만 이에 편승한 투기세력들로 환율이 급등하는 부작용을 초래한 것이다.
이상빈 한양대 교수는 “1997년 IMF 위기 때 우리는 금융의 취약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이를 정상화하기 위해 156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다”며 “금융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한 또 다른 위기는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홍범 경상대 교수도 “정부의 의견을 시장에 반영하려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며 “지금처럼 정부가 정책을 미리 정한 뒤 민간이 일방적으로 따라오게 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