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름 깊어가는 제당·제분업계]원재료값 반영도 못했는데…

입력 2011-05-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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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구매한 원당 6월부터 출시…하반기 문 닫는 곳 나올 수도

▲원당과 소맥의 국제가격이 가장 비쌀 때 사들여 만든 설탕과 밀가루 제품들이 대형마트 등에 속속 공급되고 있다. 사진은 30일 오후 용산의 한 대형마트에서 고객이 밀가루를 살펴보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6월이 되면 지난 1~2월 최고가에서 구매한 원당이 가공과정에 들어가 제품으로 출하되기 때문에 적자가 가장 심할 겁니다. 이번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하반기에 큰 위기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최근 만난 식품업체 고위 임원의 하소연이다. 그는 MB정부의 물가억제정책으로 원당과 원맥의 국제시세가 1년 사이 많게는 두배 이상 치솟았지만 제품가격에 적용하지 못해 매달 적자가 70~80억원대에 달한다고 밝혔다.

하반기 적자폭이 퍼질 것을 예상하면 연말 누적적자는 1000억을 훌적 넘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업계가 위기 국면으로 인식한 이 시기에 이명박 대통령은 또 다시 “~가 이상해” 식의 발언을 해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 대통령은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 87차 국민경제대책회의에서 “(독과점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올릴 때와 내릴 때 반영 기간이 다르다”면서 “무엇보다 투명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제 곡물가의 하향 안정세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이 가격 인상 움직임에 대해 우회적으로 경고한 것이지만 업계와 정부의 입장차는 여전히 심하다. 대통령의 발언은 곧바로 실무부서로 내려가 가격인하 압박으로 이어지고, 업계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재로 이어지기 때문에 업계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7월이 고비 왜? = 국내의 대표적인 설탕 제조업체 CJ제일제당은 2010년 부터 올 초까지 세 번의 설탕 출고가를 인상했다. 2010년 8월 8.3%를 인상했고 2010년 12월 9.7%, 2011년 3월 9.8% 올렸다. 어림잡아 30% 정도 가격을 올리며 적자 탈출에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올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10.3%나 떨어졌다. 바이오와 제약사업을 포함한 생명공학 부문이 3%, 가공식품 부문은 15%대의 매출 성장세를 보였지만, 원당과 곡물가 등 제조원가가 올라 영업이익은 오히려 감소했다.

실적이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업체들은 원당 등 국제 원재료가와 국내 판가의 괴리가 주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원당 통관 가격은 2009년 9월 대비 92% 상승했지만 실제 판가 인상은 31%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제일제당은 2010년 설탕사업부문에서만 400억원의 대형적자를 기록했다.

업계 관계자는 “올 3분기 역시 그동안 누적되온 판가 미인상분으로 대형적자가 우려된다”며 “원당 가격이 가장 비쌀 때인 1~2월 물량이 현재 제조에 들어가 시장에 풀릴 경우 6~7월이 가장 큰 고비일 것 같다”고 말했다. 하반기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통관가 마저 최고 = 최근 1년간 원당가격이 가장 비쌌던 때는 올해 1월로 파운드 당 평균 32.70달러였다. 5월 평균 21.53달러로 표면적으로는 최근 가격이 많이 내렸다. 하지만 환율과 세금이 적용된 통관가는 시차가 있다.

지난 1월 원당 선물가격이 최고가를 찍었을 때 통관가는 694원(1t 기준)이었지만 5월에는 통관가가 874원으로 오히려 최근 가격이 더 높았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국제원당을 구매하면 벌크선으로 장기 해상운송 과정을 거쳐 들어오기 때문에 국내에 도입되기까지 대략 3~7개월 정도 소요가 된다”며 “5월 평균 국제원당가 시세가 21.53센트인데 통관가는 t당 874달러로 사상 최고인 이유는 바로 이런 시간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도 설탕 제조업체들은 폭등하던 원당값을 제품에 반영하지 못해 많게는 전년 대비 50% 이상 영업이익이 줄어들었다.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 설탕생산업체 빅3의 지난해 영업이익도 전년 대비 각각 21.03%, 40.5%, 62.99% 감소했다.

설탕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대한제당의 영업이익 감소가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을 봤을 때 CJ나 삼양사도 바이오나 화학 부문이 상쇄하지 못했다면 큰 폭의 이익감소가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원당 가격은 2010년 5월 평균가가 파운드당 14.31 센트였고 올해 5월은 이보다 50.45%나 올랐다. 세계 최대 생산국인 브라질의 가뭄과 한국의 원당 주 수입국인 호주의 지난 겨울 수확철 홍수 피해로 말미암어 수확량이 줄고 운송 차질 등이 이유다.

밀가루를 생산하는 제분업체들은 설탕생산 업체들보다는 덜 할 뿐이지 어려움은 마찬가지다. 국제 소맥 시세가 하향세를 지속할 때 제분업체들은 2008년과 2009년, 2010년 3차례의 가격 인하를 단행했다. 하지만 2010년 1월 소맥 가격이 223달러(1t 기준)로 최저점을 찍고 올 4월 397달러로 80% 가량 뛰었음에도 지난 4월 9% 안팎의 가격인상밖에 하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원당과 원맥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환율 하락(원화강세)분까지 합치면 가격인상 효과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부도업체 나와야 현실직시할까 =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자 최근 식품소재업체 임원들은 만날 때 마다 서로 뼈있는 농담을 던진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 “당신네 회사가 부도를 내는 것이 어떤가. 그래야 정부가 정신 차릴 것 아닌가.”그만큼 강력한 자극없으면 정부의 시각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업계는 그 동안 다양한 통로로 업계의 어려움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갖고 청와대는 물론 정부부처에 사정을 해도 눈 하나 껌뻑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제당·제분 부문에서 적자가 나면 다른 사업부문에서 메꾸라는 말만 되돌아오곤 했다”고 전했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지난 26일에는 청와대에서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려왔다. 대통령이 국제 곡물가의 하향 안정세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이 제품 가격을 올릴 때와 내릴 때의 반영기간이 다르다고 지적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기름값이 묘하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후 정유업계가 100원씩 가격을 일괄적으로 내렸음에도 담합을 이유로 4000억원이 넘는 과징금 폭탄을 맞은 것을 떠올리고 있다. 정부 말을 듣지 않고 가격인상을 할 경우 어떤 제재가 나올지 뻔하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3·4분기 적자에 대한 고민이 많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더 이상의 인상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며 “결국 올해 장사도 물건너 간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고개를 떨궜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 대통령 취임 때부터 물가안정을 위해 밀가루값 인하를 세번이나 했지만 칭찬 한 번 못들었는데 올릴 때는 계속 눈치만 봐야하니 속이 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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