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ㆍ신뢰ㆍ정체성 실종…'국민은 없다'

입력 2011-06-07 10:58 수정 2011-06-0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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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기본으로 돌아가자]①표류하는 대한민국

▲일러스트=사유진 기자 yjsa2018@
대한민국호(號)가 정체성을 잃고 총체적 위기에 직면했다. 대통령은 주요 국책사업에 대해 말 바꾸기를 하고, 정치권에서는 재정건전성은 뒤로 한 채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만 쏟아내고 있다.

저축은행 사건은 관료사회의 막장드라마를 보여주고 있고, 잇따른 자살과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은 사회 구석구석까지 만연된 정체성 및 원칙 훼손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냈다.

최소한의 상호신뢰나 원칙이 무너지면서 대한민국이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결국 ‘기본’을 잃어버린 정부가 국민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꼴이다.

과학벨트와 신공항등 국책사업 추진과 관련, 이명박 대통령의 ‘말 바꾸기’는 지역 간 갈등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신의 골을 깊게 했다.

동남권 신공항은 대구·경북-부산·경남,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이전을 놓고는 경남-전북, 과학벨트를 둘러싸고는 충정-대구·경북-광주·전남의 지역간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최근 북한의 남북간 비밀 접촉 폭로는 겉으로는 대북 강경정책을 고수하면서, 뒤로는 정상회담을 애걸하는 정부의 이중적 자세의 전형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신분인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 불법사찰이란 일대 사건이 벌써 잊혀질 정도다.

일관성과 조화를 이뤄야 할 당청간에도 균열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저축은행 사태를 조사 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를 한나라당을 포함한 여야가 합의했지만, 청와대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서면서 당청간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사개특위 간사인 주성영 의원은 “사개특위 활동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청와대가 그런 의견을 낸 것을 뒷 북을 친 것이 아닌가 한다”며 청와대를 겨냥했다.

외교통상부의 초등학교 수준의 실수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외교부가 한·유럽연합(EU) 및 한·미 자유무역협정 각 300여건의 번역 오류라는 일어나서는 안 될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국제적인 망신이다.

지난해 9월초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파문도 전국 예비 취업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기득권층 신분세습의 집요함을 그대로 보여준 대목이다.

외부의 부당한 압력, 로비, 청탁 등에 휘둘리지 말고 감사하라고 독립성을 보장 받은 감사원조차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감사위원회가 청탁과 전관예우, 금품수수 등 여러 추문에 휩싸였다.

현 정부 출범 이후 3년3개월 동안 모두 47번의 대책을 발표한 부동산 대책은 약발이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땜질·늑장대응이라는 비판이 들끓으면서 시장의 불신은 물론 전·월세 가격만 부추긴 모양새다.

특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저축은행 로비사건에서 절정에 달했다. 금융감독원 검사역과 전·현직 국장급이 잇따라 검찰에 체포·구속됐을 뿐 아니라 김광수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다.

일부에서는 저축은행이 14명의 여야 국회의원에게 500만원 이상의 고액 후원금을 기부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내년 총선·대선을 겨냥해 정치권에서는 선심성 무상복지 정책들을 쏟아 내놓고 있다. 한나라당이 추진 중인 반값 등록금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2조5000억원에 달하는 재원을 필요하고, 민주당이 내놓은 무상급식·무상의료·무상육아까지 합하면 총 소요재원은 무려 21조~23조1000억원에 이르지만 재원마련 방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국가 재정건전성이야 어떻든 일단 표만 얻고 보자는 정치인들의 이기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식상할 정도다.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지식경제부 등 경제부처들은 끝없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정유업계, 유통업계, 통신업계 등 기업만 압박하고 있다.

정유업계가 ℓ당 100원씩 기름값을 인하하면서 짐을 나눠졌지만, 유류세 인하 등 정부의 고통분담은 찾아볼 수 없다.

정부의 인위적 물가 인하정책은 자유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을 왜곡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물가잡기에 몰입한 정부에게는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형국이다.

실제로 통계청에 따르면 실업률과 물가상승률 등으로 구성된 올 1분기 ‘경제 고통지수’는 8.7%로 2001년 2분기 8.8%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렇다 보니 ‘정정당당’이 기본 원칙인 K리그에서 승부조작을 통해 일확천금을 노리고, 경북 성주군 하천 부근에서는 남녀 4명이 집단자살을 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28.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1.4%보다 3배 가량 높고, OECD 국가 중에는 1위라는 게 어색하지 않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 교수는 “통치는 신뢰가 핵심이다. 공정사회라고 하는데 공정은 고사하고 말을 바꾸면서 불신과 의혹에 따른 회의가 크다”며 “국가가 제역할을 할 때 국민도 정부를 신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대학 교수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논어에 나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인용하며 “지금이 바로 정부가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적 원칙과 신뢰 등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시기”라며 “정부는 정부, 정치권은 정치권, 국민은 국민이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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