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국내 주요그룹들의 본사 역시 서울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들의 시작이 모두 서울은 아니었다.
국내 주요그룹들은 창업주의 고향을 중심으로 태동했다. 이후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서울로 집결, 오늘날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도 창업주의 고향지역에는 거대 그룹의 태동이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있다.
본지는 창간 1주년을 맞아 국내 주요그룹들의 태동지역을 되짚어봄으로써 그들의 시작과 현재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무역업에서 제조업으로, 그리고 중화학공업과 전자산업을 거쳐 최첨단 반도체산업에 이르기까지 이병철 회장은 사업을 시작한 이래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자 뿌리다. 기업 발상지도 마찬가지다. 고향과 기업 발상지의 다른 점은 확실한 창업주와 기업 전통이 있는 곳만 이를 기념할 수 있다는 것. 이병철 회장이 꿈을 키워온 대구 삼성상회 터는 바로 그래서 기억해야 할 장소다.
◇기념공간으로 다시 찾아온 삼성상회= 대구시 중구 인교동 61-1번지. 1938년 3월 1일, 당시 28세의 이병철 선대 회장이 ‘삼성상회’를 건립하며 꿈과 야망을 펼치기 시작한 삼성의 발상지다. 현재 이 곳에는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은 ‘삼성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가 있던 자리’란 표지와 1층을 떠받치던 6개의 기둥, 그리고 간단한 설명을 담은 동판 몇 개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삼성의 역사적 상징물로 보존되다 1997년 9월 대구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된 이후 13년간 그랬다.
하지만 2010년 고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가 삼성상회 터 기념공간 조성을 추진, 지난 6월 준공식을 가지며 삼성의 발상지는 새로운 역사적 장소로 탈바꿈했다.
사업을 추진한 대구시 관계자는 “이병철 회장은 삼성을 대구에서 출발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시켰으며,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추구의 철학을 가진 선구자로 모든 경제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며 기념관 설립 의미를 밝혔다.
기념공간 안에는 과거 삼성상회의 모습을 부조로 새긴 높이 5.95m·폭 8.7m의 ‘삼성상회 재현 벽’과 삼성상회의 실물을 250분의 1로 축소한 청동모형이 있다. 과거 이곳 1층에는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제분기, 국수틀인 제면기가 있다. 왼쪽에는 응접실과 온돌방 그리고 사무실이 있었다.
◇이병철 회장의 꿈=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경북 대구시 수동(현 인교동)에 사업 근거지를 잡고 지하 1층, 지상 4층의 250평 남짓한 점포를 사서 ‘삼성상회’란 간판을 걸었다.
삼성의 삼(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 삼성상회는 대구 일대에서 생산되는 청과류와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며 쑥쑥 커나갔다.
이후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하고 ‘별표 국수’를 만들어 팔아 더 큰 인기를 끌었다. 국수를 사기 위해 도소매상들이 끌고 온 짐자전거와 소달구지 등으로 상점 앞은 언제나 북적거렸다.‘별표’라는 상표는 세 개의 별을 뜻하는 ‘삼성’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업이 번창하자 이 회장은 1년 만에 대구에서 첫손에 꼽히던 ‘조선양조’를 인수해 대구 지역의 손꼽히는 사업가로 올라선다. 대구 삼성상회는 광복 후인 1948년 서울로 진출해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할 때까지 이 회장의 든든한 사업 기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병철 회장은 이후 전쟁으로 빈털털이가 됐지만, 삼성의 발상지 대구는 구세주가 됐다.
이 회장은 1948년 서울로 진출하기 전 삼성상회와 조선양조 경영을 직원들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서울에서 1년 만에 무역업 랭킹 7위에 오르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6·25 전쟁이라는 대재앙을 만나면서 모든 재산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그동안 수익금을 모아 무려 3억원을 비축해 둔 대구의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직원들이 이 돈을 이 회장에게 전달했다. 이 자금이 이병철 회장이 재기하는 발판이 됐다. 전쟁으로 재산을 잃었지만 대신 사람을 얻은 것이다.
호암의 사람 보는 눈이 빛을 발한 것은 물론이고 “의심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쓴다면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인재경영의 철학도 이때 시작됐다.
◇제 2의 도약, 제일모직= 삼성상회 터에서 멀지 않은 곳인 침산동에는 삼성그룹 성장사에 또 다른 이정표가 된 옛 제일모직 터가 자리해 있다. 1954년 설립한 제일모직은 한 해 전 출범한 제일제당과 함께 이병철 회장의 이름 석자를 재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영국제 양복 한벌 값은 웬만한 봉급 생활자의 3개월분 급료와 맞먹는 6만환이 넘었지만 제일모직의 양복은 2000환에 불과했다. 초반에는 국산품에 대한 불신으로 잘 안팔렸지만, 품질이 외국제와 맞먹는다는 평판이 퍼지면서 큰 인기를 얻는다.
1957년 10월 26일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제일모직 대구 공장을 방문했다. 이 대통령의 첫번째 공장 시찰이다.
이 대통령은 시찰을 마친 후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애국적 사업이야. 이처럼 자랑스러운 공장을 세워 줘서 감사해. 제일모직의 노력으로 온 국민이 좋은 국산 양복을 입게 됐구먼”이라고 치하했다. 이 대통령은 또 옷이 모든 백성들을 입힌다는‘의피창생(依被蒼生)’이란 휘호를 남겨주기도 했다.
제일모직 대구공장은 수십 년 된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 등 유실수가 가득했다. 이 때문에 대구시민들은 이 곳을‘제일공원’이라고도 불렀다. 이 회장은 자서전‘호암자전’에서 “공장 부지 전체를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생각하는, 말하자면 정원 공장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꾸미고 싶었다”고 적었다.
제일모직 대구 공장은 1996년 구미사업장으로 통합되면서 폐쇄됐다. 지금은 이 회장의 집무실이 있던 본관 건물과 기숙사 만 일부 남아있다. 담쟁이덩굴이 건물을 뒤덮은 기숙사는 현재 삼성전자서비스의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기숙사로 꼽히는 이곳은 목욕실·세탁실·다리미실·휴게실 등에 잘 갖춰져 있다. 복도에도 회 나무를 깔아 차분한 안정감도 들도록 했다. 이병철 회장이 기숙사나 조경에 마음을 쓴 것은 전 종업원을 가족처럼 대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면 작업능률도 반드시 향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병철 회장의 이같은 사람 중심 기업경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도전 역사 속에서 계속 됐다. 이는 글로벌 톱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원동력이었다. 오늘날 삼성의 발상지에는 고 이병철 회장의 땀방울이 아직도 맺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