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대로에서 4년넘게 털장갑 등 잡화를 판매한 권모(60·여)씨의 한탄이다. 화려한 강남대로 ‘불야성’은 옛말이 됐다. 17일 토요일 오후 5시 한창 판매가 이뤄져야할 시간이지만 개시한지 5시간이 이뤄지도록 손님은 간 데 없다.
연말 내수시장에 한파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발디딜 틈이 없이 붐비던 대한민국 소비 1번지 강남과 명동 일대가 무너지고 있다. 경기 침체로 소비 심리가 꽁꽁 얼어 붙으면서 연말 특수가 사라진지 오래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즐거울만도 하지만 상인들의 찌푸린 얼굴은 펴지지가 않는다.
권씨와 인터뷰하는 동안 젊은 여성 한 명이 털장갑을 두고 “이거 얼마에요?”라고 물어봤지만 가격을 듣는 순간 획 하니 가버렸다. 작은 모포 하나에 의존한 권씨는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그저 기다리며 바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손님이 사라진 강남거리에는 오후 5시임에 불구하고 노점상들이 개시조차 하지 않았다. 일부 노점상들이 가판을 깔아보지만 추운 날씨에 을씨년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다.
강남역 A 고급 패션 브랜드 매장에는 오후 2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방문하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건너편 화장품 매장 3곳은 평소 호객하는 여성 직원의 목소리가 끊기고 매장 내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은 기 현상을 자아내기도 했다. 매장 인테리어는 연말을 맞아 화려해졌지만 연말 특수가 실종된 것이다.
음식점은 더 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웠지만 텅빈 자리가 가득했다. B 고급음식점주 최 모(45·남)씨는 “예년같으면 송년회 자리 예약을 한달 전에 끝냈지만 올해는 연말까지 자리가 남아있다”며 “연말 대목이 없어져 직원들 보너스는 커녕 직원수를 줄여야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강남역 지하상가에서는 할인행사가 봇물을 이뤘다. 겨울의류에 대해 1만원 정찰을 붙이는가 하면 오늘만 80% 세일을 한다는 글귀가 여기저기 보였다. 바로 앞 세일 행사를 하지 않던 C 브랜드 매장은 직원 2명 외 손님이 1시간동안 한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주변 매장보다 2배 정도 비싼 가격 탓이다.
매장 관계자는“품질을 높여 세일을 안했더니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며“우리도 무슨 행사한다고 써붙여야 임대료라도 건질 것 같다”고 푸념했다.
이에 반해 강남대로 횡단보도 근처에 위치한 저가 선물·완구·문구 D매장은 초대박을 맞았다. 계산을 하기 위해 줄 선 손님들과 구입을 위해 들어오는 손님들로 초만원이었다.
이희영(24·서울 상도동)씨는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에 줄 선물을 사기위해 이 곳을 찾았다”며 “지난해에는 백화점에서 선물을 구입했지만 올해는 지갑사정도 어려워 저렴한 이 곳에서 해결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 9층 생활가전층에 마련된 할인전 코너의 직원은 “어제 마련된 코너인데 딱 3일동안만 진행한다”며 “평소에 최대 10%까지 할인했으나 이번에 30%까지 할인한 가격으로 선보인다”고 말했다.
제품을 둘러보던 오연지(여·31)씨는 “세일을 많이해서 사고 싶지만 할인한 와인 글라스 2P에 4만원대라니 지갑 열 엄두도 안 나네요”라며 제품을 사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백화점의 세일 공세에도 손님들의 소비심리는 쉽게 열리지 않는 듯 했다. 소공동 롯데백화점 지하 1층 매장에도 겨울 잡화 할인기획전이 여기저기서 펼쳐졌지만 할인율이 높은 곳에 손님이 몰릴 뿐 비교적 한산했다. 한 직원은 “저기 봐요, 장갑 할인 매대가 일렬로 진열돼 있지만 할인해도 5만원대가 넘어가는 매대에는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주얼리와 모피 매장은 할인 매장과 같은 층에 있지만 고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할인 매장에 온 손님들에게 접객 효과를 보고자 했지만 비싼 가격 탓에 소용이 없었다.
불황을 모르던 명품관 마저 연말특수 실종의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명품인 샤넬, 조지 아르마니, 펜디 등 매장에는 단 한명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루이비통 매장엔 줄지어선 손님들이 눈길을 끌었다. 한번에 한 손님만 맞이한다는 마케팅으로 고객들이 줄을 서는 것이지만 예년에 비하면 줄이 길지 않다는 게 매장 측 설명이다.
항상 북적거리던 명동일대도 한산했다. 명동은 이맘때 즈음이면 항상 들리던 길거리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사라졌다. 명동에서 수년째 오뎅·떡볶이 매대를 운영해온 박(남·50)씨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리지 않은건 올해가 처음”이라면서 “20대 손님마저 찾지 않으면서 근처 가게들이 풍전등화 신세”라고 탄식했다.
근처에서 간식 노점을 하고 하고 있는 김(남·56)씨도 “지금쯤이면 점심시간 한참 지났으니 떡볶이 같은 간식거리를 사람들이 찾기에 몰려야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마저도 많지 않다”며 “연말 장사가 예년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할인율이 높은 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모습은 명동도 마찬가지였다.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숍이 몰린 거리에서 그 모습이 확실이 나타났다. 50% 세일을 하는 미샤와 네이처리퍼블릭의 매장에는 사람들이 몰렸지만 그 앞과 옆에 있는 다른 브랜드숍은 세일행사가 없었던 탓이라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불황을 모르는 SPA 매장도 마찬가지였다. 망고 매장에서 이야기를 나눈 이모(여·25)씨는 “50% 할인한 폴라티가 4만9000원이면 5만원이란 말인데 할인해서 저정도니 물가가 정말 많이 올랐나보다”며 끝내 그녀는 옷을 사지 않고 매장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