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인문학’열풍] ‘금융은 서비스’文·史·哲 사람을 보듬어

입력 2012-03-14 08:30 수정 2012-03-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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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금융지주사 회장 중 4명 인문계열 전공…고객·직원들과 사교성 강점

은행권에는 역사에 남을 한 장면이 있다. 지난 1998년 외환위기로 은행이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다.

1998년 6월20일.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류시열(74) 제일은행장, 김승유(69) 하나은행장, 김진만(70) 한미은행장, 라응찬(74) 신한은행장, 홍세표(77) 외환은행장, 신복영(77) 서울은행장을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은행들에게 인수·합병(M&A)이란 권고 아닌 권고를 하기 위해서다. 내로라하는 우리나라 대표 은행장들이 모였지만 사면초가 앞에서는 고개를 세우기 어려웠다.

그럼 당시 한 자리에 모였던 은행장들의 전공을 살펴보면 어떨까. 서울대 법대 동문인 류시열 제일은행장과 김진만 한미은행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경계열 전공자였다. 김승유 당시 하나은행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홍세표 외환은행장은 같은 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라응찬 신한은행장은 당시 상고 중 최고 명문인 선린상고에서 학업을 마쳤다. 신복영 서울은행장은 1959년에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들 뿐만 아니다. 퇴출 위기에 내몰려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장철훈(77·서울대 상학) 조흥은행장, 배찬병(75·연세대 상경대) 상업은행장도 상경계열 전공자였다.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주택은행 수장이었던 김정태(65·서울대 상대)도 같은 전공 출신이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상경계열이 은행권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꿰찼다.

그로부터 14년 후인 현재는 어떨까. 상경계열보다는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전공자들이 은행권 CEO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격세지감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우선 우리·KB국민·신한·하나·농협금융 등 5대 금융지주 회장 중 4명이 비상경계열 출신이다. 이팔성(68) 우리금융 회장은 고대 법대를 졸업했고 한동우(64) 신한지주 회장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김정태(60) 하나금융 회장 내정자의 출신학교 및 학과는 성균관대 행정학과다. 신충식(57) 농협금융 회장은 고대 사학과에서 수학했다. 고대를 나와 총장까지 지낸 어윤대 KB금융 회장만이 경영학을 전공했다.

비상경계열의 강세는 은행장에서도 두드러진다. 민병덕(58·동국대 경영) 국민은행장과 김종준(56·성균관대 경제학) 하나은행장 내정자를 제외하고는 우리·신한·외환·기업은행장은 모두 인문사회과학 전공 출신이다.

숫자의 논리를 파악하는 금융. 사회와 사람에 대한 본질과 법리를 파헤치는 인문사회. 언뜻 정반대에 위치한 학문이 금융권에세 대세가 됐다.

21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비상경계열은 더 힘을 얻고 있다. 은행권을 비롯, 보험사, 카드사 대표 기업들에서 2010년 이후 신규 취임한 CEO 18명 중 11명(61%)이 인문사회계열 출신이다.

지난해 6월에 취임한 송진규(51) 메리츠화재 사장은 고대 수학교육과를 나왔다. 같은 해 3월에 취임한 최기의(56) 국민카드 사장은 동아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지난해에는 성대 법학과를 나온 이순우(62) 우리은행장이 취임했다. 올해는 윤용로(57·한국외국어대 영어학) 외환은행장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인문사회 계열의 바통을 이어갔다.

이 같은 기조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거친 것과 무관치 않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공급과 수요 그래프에 환호하고,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시장주의를 맹신하던 주류 경제학이 퇴보하면서 기업의 최고 경영자의 덕목이 학식보다는 인문과 사람에 무게추를 옮겼다. 금융의 본질은 숫자가 아닌 바로 서비스업이란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하며 그룹의 최고 위치까지 올라간 CEO들을 보면 고객과 직원에게 친화적으로 다가가는 사교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순우 우리은행장은 지인의 경조사에 참석할 때는 자신이 내려고 마음먹은 금액의 두 배를 봉투에 담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금융사도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다. 국제화 시대에 해외진출을 위한 연구, 조사와 전략 수립에 대한 필요성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경영 계열이 돋보이기도 한다. 최흥식(60·연세대 경영학) 하나금융 사장 내정자는 프랑스 릴르 제1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 위원, 한국금융연구원장을 거친 전문 연구·조사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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