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보기술(IT) 관련 회사를 창업한 A씨는 10년 전 유행하던 엔젤투자가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투자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해 찾아간 모 기관의 담당자 몇 마디에 금세 돌아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개인 투자자보다 믿을 만하다는 생각에 두드려봤지만 빗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A씨는 “미래의 가능성을 담보로 창업 3년 이내 기업에 투자한다는 엔젤은 정부에서 만든 요란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민간투자자를 찾기란 쉽지 않고, 정작 기관들은 업력이나 매출규모를 통해 배당 수익만 따져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짓고 있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16일 벤처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엔젤투자 활성화 대책을 내놓는 등 창업 초기 기업 육성에 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실제 기관투자자들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며 형식적인 지원에 그치고 있다. 또한 민간 투자자들도 기술력 있는 기업 발굴보다는 정부 지원 여하에 따라 투자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있어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스타트업 기업들은 창업 3년 이내를 소위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만큼 필요한 자금이 집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며 “10년 전처럼 창업(투자) 붐만 일으키려는 무리한 홍보와 어설픈 지원은 벤처 생태계에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엔젤투자는 2000년대 초반 국내에 불어 닥친 벤처 열풍과 함께 황금기를 맞았다. 개인들의 돈은 벤처시장에 집중됐고, 기관들 역시 전략으로 벤처투자에 베팅(betting)을 시작했다.
벤처투자로 큰돈을 만지게 된 일부 투자자들의 성공담이 자주 오르내리자 자본은 온통 벤처시장에 쏠렸다. 이후 단순히 투자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엔젤투자는 곧 한탕주의에 편승한 ‘묻지마 투자’로 변질됐다. IT 버블과 코스닥 시장이 붕괴되면서 엔젤투자도 크게 위축됐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국내 엔젤투자 규모는 2000년 5493억원에서 2010년에는 326억원으로 94% 감소했다. 벤처캐피탈의 창업초기투자 비중도 2000년 72%에서 2010년에는 29%로 떨어졌다. 개인 엔젤투자 역시 2만8875명(2010년)에서 784명(2010년)으로 감소했다. 엔젤투자의 다음 단계로 불리는 벤처투자 규모가 이미 1조원을 넘어선 점에 비춰보면 엔젤투자는 거의 전무한 셈이다.
이러한 과오를 뒤로 한 채 최근 엔젤투자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정부가 중소기업청을 앞세워 이를 주도 하고 있다. 중기청은 지난해 말 벤처캐피탈협회 내 엔젤투자지원센터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창업 활성화와 엔젤투자에 수반되는 위험을 분산할 수 있도록 올해 700억원 규모의 엔젤투자매칭펀드를 운영할 계획이다.
기술신용보증기금(이하 기보)의 경우 엔젤투자와 개념이 비슷한 ‘보증연계투자사업’을 오는 7월 재개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기보는 2005년부터 창업 3~5년 이내의 기업을 대상으로 ‘보증연계투자사업’을 진행해 오다 지난해 말 금융감독위원회의 운영지침 폐기로 신규투자를 중단한 바 있다.
◇포퓰리즘에 이끌려 다니는 엔젤= 엔젤투자 부활의 신호탄이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데도 이를 지켜보는 벤처 업계에는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엔젤투자 활성화는 종국에 벤처기업의 생태계를 튼튼하게 하는 영양분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이러한 엔젤투자가) 다시금 활기를 찾고 있지만 시장이 아닌 정부의 지원 정책으로 인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불안 요소”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 상황은 이명박 대통령이 청년 창업가 육성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게 시금석이 됐다”면서 “다시 말해 정권이 교체되면 언제라도 다시 뒤집어질 수 있다는 얘기”라고 꼬집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투자 환경 조성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앞서 중기청은 엔젤투자 활성화 대책으로 지난 1월부터 엔젤투자에 대한 소득공제 비율을 기존 10%에서 20%로 상향 적용했다. 엔젤투자자의 지분 의무 보유 기간도 5년에서 3년으로 줄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보다 적극적인 개선책을 주문하고 있다. 일환으로 미국과 같은 인수합병(M&A)시장 확대를 지목했다. 적대적 M&A가 아닌 투자자와 스타트업 기업간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
한 인수합병(M&A) 전문가는 “엔젤투자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투자금 회수에 따른 유동성 확보인데 우리나라는 기업공개(IPO, 주식 상장)를 선호하고 미국은 M&A가 우세하다”면서 “그만큼 국내 투자 환경은 회수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득이 크지 않지만 미국은 유연한 대처가 가능해 기업이나 투자자 모두에게 매우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한국형 엔젤투자 환경 창출해야= 미국의 실리콘밸리 신화는 엔젤투자가 뒷받침 됐다. 미국의 벤처기업 개념은 우리나라와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경우 시장에서 투자를 받은 기업을 통칭해 벤처라고 부르며 각종 정부 지원이 뒤따른다.
반면 국내의 벤처 환경은 관련법에서 정한 자격요건을 충족하는 기업을 벤처로 인정한 뒤 정부와 민간이 따로 움직인다. 선택과 집중의 폭이 그만큼 좁아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은 스타트업 기업의 미래 가치를 시장에서 냉철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도 적고, 전폭적인 지원이 가능하다”면서 “우리나라는 정량화된 기준에만 맞으면 벤처투자의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기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 리스크가 커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투자환경이 상이한 미국을 따라가기 보다는 관련 기관이나 단체가 민간 엔젤투자의 표준을 마련하는 등 한국형 엔젤투자의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0년 전 성행했던 ‘묻지마 투자’ 재현을 막는 안전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엔젤투자가 활성화 될 조짐을 보이자 개인투자자들의 모임인 ‘엔젤클럽’이 최근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4월 현재 엔젤클럽은 전국에 약 40개(업계 추정)가 결성돼 있으며 연말까지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한 엔젤클럽 대표는 “엔젤클럽의 등록 요건이 간단해 매칭펀드를 노린 가짜 엔젤을 구별해내기 쉽지 않다”며 “적격 투자 건수 상향 조정과 주요 투자자의 역량을 계량화해 평가하는 등 엔젤클럽 심사 기준을 강화해 건전한 투자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