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단계부터 ‘후궁 : 제왕의 첩’에 대한 대중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그 관심사 때문에 ‘후궁’의 시나리오는 제작 전부터 충무로에서 꽤 유명했다. 관심사와 유명세의 중심은 물론 ‘노출’이었다. 출연 제의를 받은 일부 여배우들은 부담감에 난색을 표하며 고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개된 영화는 전혀 다른 코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성도 측면에서 올해 최고 영화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출연 제의를 고사한 여배우들이 후회할 정도다. 지금부터 사심 가득한 해부학 시간을 열겠다.

영화 ‘후궁’은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를 만든 김대승 감독이 절치부심 끝에 내놓은 6년 만의 신작이다. 전작들을 통해 인물 간 감정의 파열음을 시각화 하는데 능수능란함을 선보인 그가 ‘후궁’에선 깊이와 무게감까지 더했다.
‘후궁’의 완성도 설명을 위해선 여러 포인트가 있다. 우선 공간의 이용력(力)이다. ‘후궁’의 진짜 주인공은 ‘궁’(宮)이다. 배경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시대. 이미 여러 사극을 통해 우리 눈에 익숙한 궁과 ‘후궁’ 속 궁은 모든 게 다르다. 마치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생명체에 가깝다. 감독은 극중 다양한 층위의 욕망이 충돌하고 공존하는 이 공간을 하나의 지옥도로 재탄생시켰다.

두 번째는 시대 설정과 의상의 힘이다. ‘후궁’은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다. 감독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시대의 끝과 시작이 묘하게 겹치는 시기”라고만 말한다. 이런 배경 설정은 상당히 위험하다. 사극이 갖는 고유의 정서를 해칠 수 있다. 또 자칫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궁’은 영리하게도 이런 단점을 장점으로 우려냈다.

그 또렷함은 극중 의상의 콘셉트로도 힘을 전달한다. 분명 기존 사극의 톤과 ‘후궁’의 톤은 확실히 다르다. 그 다름의 경계점이 바로 시각화의 가장 중요 요소인 의상이다.
‘후궁’ 속 의상 설명을 위해선 캐릭터에 대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 ‘후궁’ 속 인물들은 상당히 제한적이란 특징이 있다. 궁이라는 공간과 그 궁에 사는 사람이다. 그 안에 사는 인물들은 살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는 법을 몸으로 알고 있다. 결국 그 통제의 방법이 의상을 통해서 시각화됐다.

주인공 화연(조여정)은 중전이란 위치와 걸맞지 않게 소박한 느낌을 준다. 국모의 자리에서 후궁으로 밀려난 뒤에는 어두운 색감의 상복을 입어 세상과의 단절을 전한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원색 계열의 강렬함으로 암투 속에서 화연의 심리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권유(김민준)는 자유분방한 성격이 의상에 드러난다. 하지만 초반 이후 내시가 돼 궁으로 들어간 뒤에는 당시 내시의 관복인 녹색 계열의 의상을 입는다. 일반 사극에서 봐왔던 녹색 계열보단 좀 더 진한 진녹색 계열의 의상이다. 빼앗김에 대한 분노와 잃은 자에 대한 허망함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숨겨야만 하는 내시이자 한 때 사랑했던 여인을 바라만 봐야 하는 복잡한 심리를 진한 녹색 옷 깊숙이 감춰버렸다.
오로지 권력에만 집착한 대비는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블랙이나 회색 톤으로 일관시켰다. 강하고 독한 이미지를 도드라지게 보이는 효과가 컸다.
이런 공간과 의상의 콘셉트는 인물들이 느끼는 ‘욕망’에 대한 설명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후궁’ 속 궁궐은 취하려는 자와 빼앗긴 자 또 그 싸움에 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자, 종국에는 살기 위해 또 다시 빼앗는 자의 욕망이 뒤엉킨 ‘지옥’ 그 자체다. 그런 전제를 깔고 ‘후궁’에 접근하자면 ‘후궁’은 ‘욕망’이 인간관계 파괴와 붕괴를 설명하는 영화로도 볼 수 있게 만든다.
허수아비 왕으로서의 답답함과 형수에 대한 연정이 극단으로 치닫는 왕, 한때 연인 사이였지만 내시가 된 뒤 복수를 꿈꾸고 궁으로 들어가는 권유, 두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며 권력 암투의 중심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반전의 키를 숨기고 있는 듯한 화연의 관계는 마지막 극단에선 격렬한 감정의 충돌이 어떻게 파국의 형태로 드러나는지 화면은 말한다. 파괴와 붕괴의 시각적 텍스트가 왜 ‘날 것’ 그대로여야 하는지가 ‘후궁’에는 너무도 적나라하게 담겼다.

‘후궁’ 속 인물들은 궁이란 한정된 공간에 갇힌 채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의 연속성을 지닌다. 지독히 폐쇄적이고 가혹할 정도로 지독함이 담긴 공간이 궁이다. 또한 영화 자체가 욕망이란 단어를 설명하기 위한 스토리이기에 노출과 궁이 가진 특징이 결합하면서 강도 높은 베드신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스스로 찾았다. 다시 말해 각각의 베드신에 캐릭터의 감정이 스며들면서 ‘후궁’의 파격성이 완성됐다. 욕망이 억눌렸기에 반대급부로 그 욕망이 컸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후궁’ 속 인물들이 그렇다.
왕과 후궁이 합궁하는 장면을 보자. 내시들과 나인들 여기에 어머니인 대비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진다. 노출 자체만의 강도는 엄청난 수준이다. 하지만 그 수준이 단순한 노출에만 머문 것이 아닌, 왕의 불안한 심리를 고스란히 담은 단 한 장면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을 몸으로 표현한 배우들의 연기도 대단했다. 전작 ‘방자전’에서의 노출로 화제를 모은 조여정은 이번 ‘후궁’을 통해선 더욱 강렬한 모습을 선보인다. 특히 그가 후반부에 보여 준 반전 카드의 충격파는 시간이 지나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다.
지금까지 수컷 냄새 가득한 모습으로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넘나든 김민준은 ‘내시’로 출연해 이미지 탈피에 성공한다. 기존 내시의 유약함이 아닌 나름의 해석을 통한 묵직한 모습은 영화 전체의 톤과 맞아 떨어지며 결코 어색하지 않게 다가왔다. 여기에 내시로서 지켜야 할 억눌림과 눈앞의 화연을 향한 사랑과 복수의 이중적 감정 대립을 설명하는 눈빛은 꼭 느껴봐야 할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이밖에 표독스런 대비 역을 맡은 박지영과 화연의 몸종 금옥으로 출연한 조은지, 내시 역의 박철민과 이경영 등이 임팩트 강한 연기로 ‘후궁’ 전체의 분위기와 톤에 일조한다.
이 모든 그림을 그린 김대승 감독은 “욕망은 늘 말하고 싶던 화두”라며 연출의 변을 밝혔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사랑에 대한 기다림의 욕망을, ‘혈의 누’를 통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적 욕망을 그린 그는 ‘후궁’을 통해선 그런 욕망들의 부딪침이 일으키는 파고의 모습을 실체화 시킨다.

단순하게 볼 수 없는 ‘후궁’의 완성 포인트. 그래서 ‘후궁’은 완벽했고, 또 충격적이었다. 올해 최고의 영화로 지금부터 추천해도 늦지 않을 그런 영화가 ‘후궁 : 제왕의 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