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노출은 근현대적 사건이 아니다. 지금이야 노출이 표현과 외설의 경계에 있지만 인류는 노출을 자연스럽고 순수한 소통으로 여겼다. 성경은 태초에 인간이 벗은 몸에 대해 수치심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노출은 시대에 따라 각양각색의 함의를 지니게 된다. 신성함에서 수치심, 그리고 에로스에서 정치적 구호에 이르기까지 노출은 다양한 변주를 그리며 인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유경희 미술평론가는 “그리스 시대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영혼이 깃든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조각상의 노출은 아름다운 육체를 숭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 가지 특이할만한 사실은 고대 그리스에서 노출은 남자들의 것라는 점이다. 이 시기 노출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의 자격을 가진 남성에게만 허락됐다.
◇르네상스, 자기긍정의 시작 =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는 진정한 의미의 노출은 중세 말에 나타난다. 르네상스와 함께 인간은 자신의 신체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는 패션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는 “여성은 가슴을 드러네는 데코르테, 슈미즈를 입고 남성은 배, 어깨, 사타구니에 패드를 넣어 인간의 몸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 특히 성적인 뉘앙스를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몸을 불결한 것으로 규정한 중세와 달리 사람들은 상대의 표정을 읽고 제스처에 의미를 두며 처세를 하기 시작한다. 이는 인간이 벗은 몸, 노출을 직시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근대, 욕망을 감상하는 수단 = 근대에 들어서며 노출은 은밀하게 변한다. 타인에 대한 시선을 끄집어 내는 수단이 되며 노출 부위도 가슴에 집중된다.
근대 회화 주제에 여성의 누드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감상자이자 소유자인 남성의 시선을 위한 수단으로 여성의 몸이 노출된다. 르네상스 노출이 자기를 긍정하는 주체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근대는 욕망을 감상하는 일방적인 시선을 따라간다.
노출이 외설 논란에 휩싸이는 것도 이 시기다. 근대 회화는 그 자체로 노출한 몸(네이키드, naked)과 노출한 몸을 이상화 시킨 것(누드, nude)로 구분해 외설의 경계를 세웠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회화가 신화적, 이상적 텍스트 안에서 감상용 노출을 그려낸 것으로 찬사받았다면 마네의 올랭피아, 풀받위에서의 점심은 세속적 욕망을 드러낸 노출로 외설 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현대, 정치적 구호를 온 몸으로 = 노출은 현대에 들어 정치적 구호이자 소통 수단으로 자리매김한다. 전쟁이나 모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시위 현장에서 나체를 평화와 비폭력의 상징으로 올려놓는다.
1970년대는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나체로 스트리킹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2003년 호주에서는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알몸으로 ‘NO WAR’라는 글자를 만들었으며 우크라이나의 FEMEN 이라는 단체는 나체 시위로 유명한 단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모피, 투우, 금융자본 등 각 분야에 나체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남정우 순천향대 교양학부 교수는 “몸을 보여주는 것은 문자보다 강력하고 더 많은 의미들을 보여준다”며 “문자를 독해하는 것은 개인의 지적인 능력이나 교육 수준, 배경에 따라 왜곡될 가능성이 있지만 상징물(벗은 몸)은 인간 언어 이전의 능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