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생상품시장은 불확실성과 금융당국의 과도한 규제로 이미 ‘식물상태’에 빠졌다. 유로존 위기 등으로 안 그래도 어려운 시장에 금융당국의 규제까지 더해지며 국내 파생상품시장 전반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거래량 감소로 수익성 부진을 겪고 있는 증권사들은 생존까지 위협받고 있다.
금융위원회 등 금융당국은 지난해 말 파생상품시장의 과도한 투기성과 높은 개인투자자 비중 등을 이유로 파생상품시장 건전화방안을 발표하고 올 3월부터 이를 시행했다. 주식워런트증권(ELW) 부당거래 의혹으로 증권사 사장들이 줄줄이 재판을 받는 등 문제가 불거지면서 금융당국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부랴부랴 자구책을 내놓은 것. 발표당시부터 파생상품시장을 극도로 위축시킬 수 있는 ‘탁상행정의 전형’이라는 지적이 거세게 제기됐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유동성공급자(LP)의 호가 제한 규제가 지난 3월부터 시행된 ELW시장의 거래대금은 급감했다. 1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1월 ELW의 일평균거래대금은 1조7000억원 정도였지만 올 4월에는 700억원으로 25분의 1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거래량역시 일평균 49억주 가량에서 5억주 정도로 크게 줄었다. 규제로 수익성이 떨어지자 국내증권사는 물론 수익성이 탄탄한 외국계증권사마저 발을 빼고 있다. 도이치증권, SC증권, UBS증권, 골드만삭스증권, 씨티글로벌마켓증권 등이 국내 ELW 사업을 접었다.
증거금을 기존 5000달러에서 1만달러로 올린 FX마진(외환차익)시장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해 8월 642억달러에 달하던 거래대금이 올 5월에는 140달러까지 줄어들었다. 투자자들은 증거금이 낮은 국내 FX마진 시장을 외면하고 해외선물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7월 기본예탁금 1500만원이 부과된 데 이어 거래 승수가 기존 1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상향 조정된 코스피200 옵션시장도 6월 만기일이 지나면서 ELW·FX마진시장의 전철을 밝고 있다. 국내 파생상품시장 일평균 거래대금은 이달 들어 54조4000억원대를 기록, 지난해 8월의 84조2829억원에 비해 약 35%나 급감했다. 특히 승수가 인상된 옵션거래의 경우 일평균 거래량이 1570만계약에서 257만계약으로 6분의 1이상 줄며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거래소는 세계 파생상품시장 거래량 1위 자리를 13년 만에 미국 시카고선물거래소(CME)에 넘겨주고 말았다. 윤석윤 거래소 파생상품제도부장은 “이대로 가다간 내년에는 거래량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날 것으로 보인다”며 “선물회사는 상위사조차 존립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고 증권사들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주식시장이 침체에 파생상품의 규제까지 겹치면서 증권사의 1분기(4~6월) 어닝쇼크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하반기 증권업계 전반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흉흉한 소리까지 들려온다. 이미 삼성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증권사들이 해외법인의 인력을 줄이는 등 상시 구조조정을 통해 비용절감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지난 2008년 키코사태와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인한 금융위기로 금융당국이 파생상품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생긴 것 같다. 파생상품이라면 무조건 나쁜 상품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파생상품의 모든 장점을 도외시하고 무조건적인 규제에 나서는 것은 관료주의의 전형”이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