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회사에게 차종 다양화는 시장 확대전략 가운데 하나다. 이들은 크게 대・중・소로 짜여진 라인업으로 시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틈새 모델을 채워넣는다.
물론 작은 차도 만든다. 자사의 소형차를 타던 고객이 더 비싼 윗급 모델로 자연스레 이어지도록한 마케팅 전략이다. 브랜드 충성도를 활용한 전략이다. 나이든 ‘어르신’의 전유물이었던 캐딜락이 CTS를 앞세워 젊은 층을 공략하고, 독일 고급차의 대명서 메르세데스-벤츠가 A, B-클래스를 내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랜드로버 역시 다르지 않다. 브랜드의 최고봉 레인지로버의 아랫급으로 디스커버리를 선보였고, 도심형 컴팩트 SUV를 앞세운 프리랜더를 엔트리급에 추가했다. 삼형제는 랜드로버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각각의 영역을 확대해 왔다. 적어도 ‘이보크(Evoque)’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보크의 등장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막내 프리랜더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다. 덩치가 더 큰 둘째형 디스커버리보다 작으면서 가격은 더 비싸다.
디자인도 확연히 다른 영역이다. 하나같이 반듯반듯한 랜드로버 라인업 가운데 유독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를 지녔다. 누가봐도 랜드로버가 아니다. 그러나 랜드로버의 브랜드 전략을 되뇌이면 이보크가 지닌 ‘존재의 당위성’을 깨닫게 된다.
21세기 랜드로버는 프리미엄 SUV와 오프로드 성향의 SUV로 양분된다. 전자에 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 이보크가 속한다. 후자에는 디스커버리와 프리랜더가 존재한다.
물론 모든 라인업이 어떤 길에 들어서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기도 하다.
이보크는 2008년 북미오토쇼에 컨셉트카로 첫 선을 보였다. 파격적인 눈매, 날카로운 직선. 모든게 파격적이었다. 상자곽을 연상케했던 랜드로버에게 신선한 바람이었다. 호평이 이어졌고 랜드로버는 발빠르게 양산체제에 돌입했다.
언뜻 차 크기만 따져서 이보크의 자리를 함부로 논할 수 없다.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가 각각 컴팩트 SUV 시장을 개척하며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SUV의 자존심을 앞세운 랜드로버가 이 시장을 그냥 둘리 없다. 프리랜더의 임무를 넓히는 것이 아닌, 걸출한 새 모델을 앞세워 경쟁상대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전략이다. 계획은 치밀했고 결과물도 걸출했다.
국내에는 4도어와 2도어 두 가지 타입이 있다. 도어 형태와 상관없이 차의 길이와 너비, 높이는 동일하다. 2.2 터보 디젤 이외에 직분사 방식의 2.0 가솔린(최고출력 240마력)도 라인업에 포함돼 있다.
플랫폼은 프리랜더2를 밑그림으로한 레인지로버 MS플랫폼. 직렬 4기통 가로배치 엔진을 기본으로 2.0 가솔린과 2.2 디젤 두 가지가 나온다.
시승차는 최고출력 190마력을 내는 2.2 디젤 SD4. 터보 디젤 4기통을 의미했던 TD4의 뒤를 잇는 새 엔진이다.
묵직한 도어를 열면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랜드로버가 눈앞에 펼쳐진다. 겉모습은 파격을 앞세웠으나 인테리어는 윗급 레인지로버의 아우라가 떠오른다. 손에 닿고 눈길이 가는 곳 모두 품위와 품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급 SUV 만들기가 경지에 다다른 랜드로버가 모든 기술을 총 망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니아의 가슴을 방망이질 한다. 호화 요트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실내는 레인지로버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실내를 둘러보면 곳곳에 스며든 재규어 DNA를 발견한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지만 회사 이름도 ‘재규어&랜드로버’다. 프리미엄 세단과 고급 SUV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각각의 영역을 확대해온 이들이 조금씩 서로의 DNA를 공유하고 시작했다. 그리고 이보크는 그 첫 주자인 셈이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면 기어봉 자리에 심어놓은 드라이브 셀렉터가 오롯이 솟아 오른다. 동그란 다이얼을 돌려 전진과 후진, 주차모드를 고를 수 있다. 한때 재규어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 랜드로버도 나눠쓴다.
다이얼을 돌려서 작동하는 시프트 셀렉터는 새로운 감각이다. 어색할 이유도 없다. 심지어 페라리는 손가락만한 시프트레버를 쓰거나, 아에 버튼을 눌러서 전진과 후진을 선택한다.
랜드로버의 장기인 ‘터레인 리스폰스’가 되려 다이얼 방식에서 버튼으로 바뀌었다. 이 장치는 모래밭과 진흙길, 자갈길 등에 따라 버튼만 눌러주면 된다. 각각의 노면 상황에 따라 차높이와 구동력 배분 등을 스스로 바꾼다.
루프는 지붕 전체를 아우르는 풀 사이즈 글라스 타입이다. 덕분에 뒷자리는 어디에 앉아도 답답함이 없다. 글라스 루프를 얹었지만 보디 강성은 탄탄하다. 더 큰 출력도 견딜 수 있는 보디는 디젤의 육중한 토크에도 끄떡없이 견딘다.
초기 가속은 매섭다. 작고 날카로운 눈매에 부족함이 없다. SD4 엔진은 고회전을 위한 엔진도 아니다. 때문에 디젤의 특성상 한방에 터지는 날카로운 토크는 일품. 반면 이 육중함을 고회전까지 이어가지 않는다.
반면 6단계로 쪼개진 트랜스미션은 최적의 기어비를 갖췄다. 핸들 뒤에 달린 ‘패들 시프트’로 적절한 기어를 찾아가면 제법 스포티하게 달릴 수 있다. 제원상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 가속은 8.5초. 체감 가속은 통괘하게 터지는 디젤의 박진감이 더해져 수치를 앞선다.
오프로드에 들어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탄탄한 하체는 흐트러짐이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구동력을 잃지 않는다. 생김새와 달리 어느 길에 들어서도 랜드로버라는 자부심을 가득 담고 있다.
이보크는 모든 면에서 랜드로버의 울타리를 벗어나 있었다. 이제껏 “랜드로버는 이런 차다”라고 정의할 수 있었으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보크는 많은 것이 달라진 랜드로버다. 동시에 21세기 랜드로버가 추구하는 궁극점을 담고 있는 상징적 모델이기도 하다.
강하되 부드럽고, 호화롭지만 결코 사치스럽지 않다는 점도 랜드로버의 매력이다. 이보크 역시 마찬가지. 오프로더와 온로더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어느 것 하나 모자람없는 모습이다.
1000km 가까이 이보크를 타면서 랜드로버에 스며든 재규어 DNA가 꽤 매력적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슷비슷한 차들이 넘쳐나는 수입차 시장에서 이런 멋쟁이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낯선 차에서 느꼈던 레인지로버의 아우라는 꽤 강했다. 그리고 진한 여운은 오래토록 뇌리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