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성민 “처절하고 애잔한… 그런 멜로 연기 해보고 싶네요”

입력 2012-10-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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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몰두하는 남자는 섹시하다. 자신이 섹시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면 더욱 섹시하다. 드라마 ‘골든타임’의 최인혁은 그런 남자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수염과 부스스한 모습마저 그의 매력이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고즈넉한 카페에서 만난 이성민에게 물었다. 섹시한 미중년으로 각광받고 있는 사실을 아느냐고. 그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그저 열심히 수술하고 열심히 일했다”고 답했다. 인터뷰 내내 떠오르는 잔잔한 미소와 듣기 좋은 말투는 따뜻한 가을 햇살과 잘 어울렸다.

(사진=양지웅 기자)

“최인혁으로 사는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대사의 70퍼센트가 대화가 아니라 환자 치료에 대한 전문용어라서. 대화 좀 하고 싶더라고요. 대화는 정서적으로 이해하고 말하듯이 연기하면 되는데 수술은 그저 암기하는 수밖엔 없었죠.”

주인공으로 극을 이끌어간다는 부담감, 생방송이나 다름없는 촬영 현장, 늦게 나오는 대본 등 몸을 고단하게 만드는 요소는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힘든 만큼 만족감도 컸다. “수술 장면 같은 경우엔 긴장을 많이 해요. NG 한 번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쭉 간 적이 있는데 끝나고 저도 모르게 선균이랑 하이파이브를 했죠. 연기하면서 그렇게 기분이 고조될 때가 있어요.”

이성민이 바라보는 인혁은 어떤 사람일까. 무뚝뚝하면서도 한없이 인간적인 최인혁을 만들기 위해 분석을 거듭했다. “냉철하지만 속은 온화하고 자상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죠. 일에 미쳐있는 사람이니까 평소에는 느리고 지치게 다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환자가 왔을 때는 누구보다 민첩하고 빠르지만요. 제가 세워 둔 최인혁이란 인물의 기준이 있고, 상황에 따라 조금씩 캐릭터를 변화시켰죠.”

올해 초 종영된 드라마 ‘브레인’에서 신경외과 과장 고재학을 연기했던 그는 ‘골든타임’ 출연을 결정하기 전 잠깐 망설였다. “처음엔 ‘골든타임’이 의학드라마라고만 들어서 약간 고민했어요. 하지만 좀 더 알고 보니 다른 이야기 다른 캐릭터가 될 거란 확신이 섰죠. 고재학과 최인혁은 극과 극에 선 인물이지만 결국 자신의 절박한 순간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시도한다는 점에선 동일해요.”

(사진=양지웅 기자)

‘골든타임’ 촬영을 위해 부산에서 지내는 동안 이성민은 부산의 진면목을 찾았다. “초반에는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어서 힘들었어요. 그러다 해운대 북쪽으로 펼쳐진 청사포, 송정, 기장 등을 알게 됐죠. 바다가 그렇게 좋은 줄 예전엔 몰랐어요. 짬이 나면 선균이, 선미 불러서 앉아 있고 그랬죠. 밥 먹고 차도 한 잔 하고 머리도 식히고. 그 순간이 바쁜 촬영 일정 속에서 가장 큰 위안이었어요. 이제는 서울에 와서 바다를 못 보니까 답답하네요.”

원래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던 그가 느끼는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이 캐릭터가 어떻게 풀려갈지 호기심이 생겨요. 물론 촬영 강행군 속에서 많이 피폐해지긴 했어요. 대한민국에서 드라마 주인공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행히 ‘골든타임’ 팀은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했다. 특히 같은 소속사에서 한솥밥을 먹는 이선균은 가장 든든한 동료였다. “선균이는 현장에서 늘 전체를 볼 줄 알아요. 스태프 챙길 줄도 알고. 전 그걸 잘 못하는데 선균이가 꿋꿋하게 가니까 의지 많이 했죠.”

이성민은 ‘골든타임’을 연출한 권석장 감독을 ‘MBC의 최인혁’이라고 표현했다. “권 감독님을 보면 늘 세트장을 따라 걷고 있어요. 드라마를 어떻게 찍을지 고민하면서요. 최인혁이 이 환자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요.”

(사진=양지웅 기자)

권석장 감독은 시청자들이 배우 이성민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준 최대 공로자다. “이성민을 캐스팅하겠다는 황당한 선택이 제 운명을 바꿔놨죠. 저를 캐스팅한다고 해서 반가워할 사람이 없었을텐데… 늘 고맙고 미안해요.” 공로자는 한 명 더 있다. “선균이도 적극적으로 절 추천하고 도와줬어요. 제 연기 인생의 반전에 그 두 사람이 있네요.”

이번 작품을 통해 잠깐 멜로를 맛 본 이성민은 멜로 연기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다. “결혼하고 나이 들어서 이런 거 해보니까 마음이 살랑살랑해요. 하하하. 은아(송선미)랑은 손도 안 잡았지만 하다보니까 ‘멜로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배우를 그윽하게 오래 쳐다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연기 호흡도 안정되고 좋더라고요.”

문득 그가 하고 싶은 역할이 궁금해졌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한 상황이나 역할은 없지만 처절하고… 아주 처절한… 애잔한… 그런 역할이 끌리네요.”

‘골든타임’이 끝나자마자 이성민은 쉴 틈 없이 연극 ‘거기’ 무대에 오를 연습에 들어갔다. “전혀 못 쉬었어요. 연극은 원래 계획돼 있었고, 드라마 끝나면 며칠 쉬다 시작하려고 했죠. ‘골든타임’이 연장되는 바람에 차질이 새겨서 추석날에도 연습을 했네요. 10월 중순부터 무대에 설 예정이었는데 조금 늦어져서 오는 21일부터 관객을 만날 수 있어요.”

그에게 무대는 휴식같은 존재다. “연극은 매일 만나서 연습해야하니까 드라마보다 물리적인 시간은 더 많이 들어요. 그런데 체력적으로는 ‘골든타임’이 훨씬 힘들었어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은 상처 난 자리에 약을 발라주는 느낌이에요. 사람들과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좋아요. 늘 하던 일이라 익숙하고요.”

(사진=양지웅 기자)

이성민은 오는 8일 방송되는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다. 의외의 선택이다. “섭외가 들어오고 나서 계속 거절했어요. 그러다 다른 프로그램보다 진솔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출연을 결심했죠. 막상 녹화하면서 좋은 풍경 속에서 이야기하다보니까 저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오더라고요.” 그는 ‘힐링캠프’에서 연극과 연기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고생한 이야기만 한 것 같아요. 연기를 제 인생에서 20년 넘게 했는데 고생을 안 하기 시작한 시점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이야기하면서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좀 미안했어요. 이제 그 시절이 저에겐 추억이 됐지만 후배들에게는 아직도 현실이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골든타임’ 두 번째 시즌이 성사되길 기다리고 있다. 이에 대해 이성민은 “아직 모르겠다”는 대답을 남겼다. “아직 구체화된 바가 없어서 시즌 2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마지막 촬영이 끝나는 순간 정말 행복했어요. 세상이 컬러로 보이는 느낌 아시나요?”

역시 한국 드라마 촬영 현장은 상상 그 이상으로 가혹한가 보다. 그렇지만 시청자의 입장에 서서 조금 욕심을 부리고 싶다. 일하는 남자의 섹시한 매력을 조만간 다시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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