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JP모건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연속 투자은행 부문 1위를 지키며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 등 라이벌들의 추종을 불허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를 제치고 자산 규모에서 미국 최대 은행으로 부상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의 글로벌 2000대 기업에서는 2010년부터 2년 연속 세계 1위 자리를 지켰다.
세 차례의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폐허를 딛고 오늘날 세계적인 금융제국으로서의 명맥을 이어온 JP모건. 그 성공의 비밀은 무엇일까.
답은 JP모건의 뿌리에서 찾을 수 있다.
JP모건은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위기대응능력이 뛰어난 로스차일드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끊임없는 사업 다각화와 본업에 대한 충실은 오늘날의 모건 제국을 건설하는 배경이 됐다.
JP모건은 로스차일드의 미국 분신으로 알려져 있다.
직물 중개상을 하던 미국 출신 조지 피바디가 영국에서 활동할 당시 로스차일드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1854년 세운 조지피바디앤드컴퍼니가 그 모태다.
JP모건 왕국의 시작은 피바디가 미국 국채를 영국 투자자들에게 중개해 주는 일을 하다가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S 모건)을 공동 경영자로 맞아들이면서부터다.
모건 가문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회사명은 J.S.모건앤컴퍼니로 변경됐다.
이후 J.S.모건의 아들인 존 피어폰트 모건이 부친으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아 1871년 필라델피아의 은행가 앤터니 J. 드렉셀과 공동으로 뉴욕에 JP모건의 전신인 드렉셀모건앤컴퍼니를 설립했다.
드렉셀이 사망하자 드렉셀모건앤컴퍼니는 1895년 JP모건앤컴퍼니로 이름을 바꿨다.
JP모건은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와 US스틸을 설립해 업계를 재편했으며 세계 최초로 시가총액 10억달러의 기업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금본위제가 공포되기 전인 그로버 클리브랜드 대통령 시절에 닥친 경제위기로 금과 은의 교환이 자주 이뤄지면서 재무부의 금이 고갈, 국가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 JP모건은 미 국채를 6200만달러에 사들여 미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JP모건은 나중에 이를 현금 1억달러로 바꿔 손에 넣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의 신뢰를 얻은 JP모건은 증권 등 미국 금융을 독점하며 금융 트러스트를 형성했다. 당시는 석유왕 존 록펠러의 석유 트러스트를 본 따 온갖 트러스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던 시절. JP모건은 트러스트 중의 트러스트라 불리며 모건 제국을 이룩했다.
“기원전 신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1901년에 JP모건과 록펠러가 지구를 바꿔버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14년 월스트리트에 들어선 본사는 ‘모건 관저’로 불리며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상징이 됐다.
JP모건은 또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란은행이 발행하는 전시채권의 독점 주간사를 담당했고 영국·프랑스의 자금줄 노릇을 하며 돈을 긁어모았다.
하지만 JP모건 역시 1929년 불어닥친 대공황의 충격을 피하진 못했다.
설상가상 은행과 증권의 겸업을 금하는 글래스-스티걸법이 제정되면서 JP모건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중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결국 JP모건은 수익이 비교적 안정적인 상업은행으로서의 길을 선택, 분리된 증권 및 투자은행 부문은 나중에 모건스탠리가 됐다. 모건스탠리의 모건은 존 파어폰트 모건의 손자인 헨리 모건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소매은행 업무를 중단했던 JP모건은 1990년대 후반 글래스-스티걸법이 개정돼 규제가 완화하면서 2000년 체이스맨해튼 은행과 경영을 통합, 투자은행 활동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