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 안영희 중앙대 교수 "부활을 꿈꾸는 겨울나무"

입력 2012-12-14 11:09 수정 2012-12-1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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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바람도 매섭게 불어 더욱 추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불어오는 찬바람을 피해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출근길을 재촉했다. 고개를 숙이고 발밑을 쳐다보며 걸어가는 동안 길가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고 투박한 플라타너스의 갈색 낙엽, 붉은 단풍나무 잎, 노란 은행나무 잎이 길가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고 길가 가로수로 눈을 돌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퍼런 이파리를 무성히 달고 풍성한 수관을 자랑하던 큰 나무들이 어느새 앙상하게 줄기와 가지만 남은 나목(裸木)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초록의 잎이 어느새 단풍이 들고 잎이 떨어진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들게 되면 더욱 이같은 계절의 변화가 민감해진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게 되면 괜스레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푸른 나뭇잎이 생기와 젊음을 상징한다면 가을철의 단풍은 노화를, 초겨울 낙엽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있는 온대지역에 자생하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이같은 형태적 변화를 거친다. 온대기후대에 살고 있는 생물에게 겨울철은 가장 견디기 힘든 가혹한 기간이다. 사람도 가을이 되면 식욕이 증가해 적극적으로 체내에 지방을 축적하여 겨울에 대비한다. 또 옷을 두껍게 입고 난방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데워 겨울을 난다.

우리 눈에는 무심하게만 보이는 식물도 어쩌면 사람 이상으로 적극적인 겨울준비를 한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면 나무를 포함한 식물들은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여름 내내 식물체에 필요한 동화양분을 만들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했던 잎에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 단풍이 찾아온다. 식물의 푸른 잎에는 광합성이 일어나는 세포기관인 엽록체(葉綠體)가 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할 일을 다 끝낸 엽록체의 초록색 색소인 엽록소(葉綠素)가 분해되어 붉은색을 띄는 안토시안 색소, 혹은 노란색의 카로티노이드와 같은 또 다른 색소로 바뀌는 것이 단풍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엽록소가 파괴되는 기작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재활용을 통한 월동 준비다. 이제 쓸모가 없어진 엽록체 안의 루비스코와 같은 효소단백질은 단백질 분해효소에 의해 아미노산→질소의 형태로 생분해돼 식물체의 줄기나 가지의 피층 조직으로 이동돼 저장된다. 루비스코는 녹색식물에 있어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효소로서 식물 단백질의 10~30%를 차지할 정도의 중요한 단백질 덩어리다. 이렇게 귀중한 단백질 자원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고 분해해 추운 겨울을 넘길 수 있는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것이다. 재활용품을 모두 회수하고 쓸모가 없어진 잎은 잎자루에 이탈층(離脫層)이 생겨 낙엽으로 떨어진다. 잎에서 이동한 질소 저장양분만으로는 월동이 불가능하므로 그동안 열심히 만들어 놓은 광합성 산물인 전분을 세포에 다량으로 축적하고 세포 속의 수분을 탈수시켜 추위에 세포가 쉽게 얼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다. 광합성이 불가능한 추운 겨울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도시락을 준비하는 셈이다. 이렇게 만반의 겨울준비를 제대로 한 식물은 봄이 되면 또 다시 싹이 트고 꽃도 핀다. 그러나 겨울 준비를 게을리 한 식물은 동해(凍害)에 의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고사하고 만다.

우리는 낙엽이 져버린 앙상한 겨울나무를 바라보고 절대 우울해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자신에게 처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야무지게 준비하는 식물의 지혜에 박수를 쳐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준비를 토대로 어둡고 긴 겨울을 견디며 화려한 봄을 기다리는 식물의 인내심을 배우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작금 우리의 주변 환경은 세계적으로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각국의 개인 부채도 심각하다는 등 차가운 겨울 만큼이나 어둡고 고통스럽다. 이럴 때일수록 묵묵히 추위를 이겨내며 화려한 부활의 꿈에 잠겨있는 식물에 대해 생각한다면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질 것 같다.

◆약력 = △일본 홋카이도대학 농학박사 △중앙대학교 산업과학대학 학장 △환경생태학회 회장 △2011년 녹조근정 훈장 △중앙대학교 식물시스템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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