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는 강력했다. 특히 연간 4~5%의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던 일본은 원자폭탄을 또 맞은 것 같은 충격에 시달렸다. 달러당 240엔대였던 엔화 환율은 1988년까지 120엔대로 폭락했다. 반면 합의 이후 2년 동안 달러 가치를 30%가량 떨어뜨릴 수 있었던 미국은 수출경쟁력을 회복해 90년대 호황을 구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엔화 가치는 G7의 역플라자 합의(1995년) 등 85년 합의를 무력화하기 위한 국제적 공조에도 계속 상승했다. 엔화가치 급등이 수출 급감-> 불황-> 경기 활성화를 위한 저금리 정책-> 주식과 부동산 분야의 버블 형성-> 거품 붕괴에 따른 자산 디플레이션 등으로 이어지며 총체적 침체로 악성화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이 된 것이다.
합의란 형태를 취하기는 했지만 근린궁핍화(近隣窮乏化·Beggar thy neighbor) 정책의 일종이었다. 영국의 여성 경제학자 조안 로빈슨이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카드 게임 ‘Beggar-My-Neighbor’를 이용해 1930년대 명명한 용어로 다른 나라의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을 일컫는다. 대공황 시대에는 수출 보조, 수입억제, 관세 부과 같은 요란한 수법이 주로 동원했지만, 최근에는 환율 조작 같은 눈에 덜 띄는 기법이 애용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이제 근린궁핍화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신하고 있다. 16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자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재는 “일본은행(BOJ)의 윤전기를 돌려서라도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 내겠다”고 공언해 둔 터다.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살리겠다”고 말해 ‘헬리콥터 벤’으로 불리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일본판이다. 미국의 양적 완화에서 촉발된 선진국의 돈 풀기 경쟁이 유럽을 거쳐 일본까지 확산된 것이다.
사실 일본도 그냥 앉아 있기에는 다급한 상황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이 실행된 이후 일본 엔화의 절상폭은 중국보다 컸다. 이 바람에 소니 등 일본의 대기업들이 3분기에 충격적인 적자를 냈고, 일본 경제 성장률도 3분기에 -3.5%를 기록했다.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란 표현이 뭔가 품격이 있는 정책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십상이지만 사실 이쯤 하면 막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저금리로 경기부양의 효과를 거둘 수 없어 돈을 무제한으로 발행할 수밖에 없다는 선진국의 설명은 환율을 조작해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고 자국 경제도 손쉽게 살리려는 꼼수의 또 다른 핑계일 뿐이다.
지구촌이 환율대전의 광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당장 한국과 브릭스(BRICs) 등 수출 주도형 신흥국에 초비상이 걸렸다. 양적 완화로 풀린 엄청난 돈이 금리가 높은데다 상대적으로 경제 전망이 이들 국가로 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외환정책은 중요하다. 1997년 외환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로 외환정책의 실패를 꼽을 수 있다. 문민정부는 경상수지 적자에도 원화 가치 하락을 용인하는 대신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보유 외환을 쏟아 부었다. 이 바람에 경상수지 적자가 200억달러가 넘어선 1996년 원달러 평균환율이 804.8원으로 1994년과 거의 똑같은 정도로 환율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쟁국이던 일본의 엔화와 중국의 위안화가 절하된 점을 감안하면 역주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무모하게 환율 방어에 집착한 것은 95년 달성한 국민소득 1만달러를 유지하자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을 듯하다.
지난달 국내에 출간된 ‘화폐전쟁’ 4권의 부제는 ‘전국시대’다. 세계적 주목을 받은 화폐전쟁의 완결판인 이 책의 저자 쑹훙빙은 달러화, 유러화 그리고 중국 주도로 한국 일본이 참여한 야위안(亞元)이 천하를 삼분해 각축을 벌이는 화폐 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야위안의 실현 가능성이나 의도 모두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통화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한중일 3국이 한바탕 힘겨루기를 할 가능성은 높다.
18대 대통령 당선자는 외환정책을 최우선 관심사로 둬야 한다. 세계는 조작이 쉬운 외환의 향배에 따라 나라 경제의 희비가 엇갈리는 난세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당선자는 이른바 거시건전성 3종 세트(외국인 채권투자 과세·외환건전성 부담금,선물환 포지션 감축) 같은 기술적 사안뿐만 아니라 진짜 거시 정책도 적극적으로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