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창시절… 1등 놓치지 않은 ‘바른생활 소녀’ =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대구 수성구 삼덕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박 전 대통령을 따라 서울에 온 박 당선인은 장충초교, 성심여중·고를 거쳐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박 당선인은 학창시절부터 ‘바른생활 소녀’,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생활기록부엔 ‘수’와 ‘우’뿐이었고, 중고교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이는 11살 때부터 청와대 생활을 하면서 대통령의 자녀로서 바른 모습을 보이려는 책임감과 그에 따른 노력의 결과다. 한 중학교 동창은 “그때도 손안에 수첩이 들어 있었다. (영어) 스펠링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고 했고, 고교 담임은 ‘근면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반장 임무를 잘 수행했음’이라고 생활기록부에 적었다.
박 당선인이 역사학을 전공하길 바랐던 어머니의 희망과 달리 전자공학과에 진학한 것도 “산업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에서였다고 한다.
◇ 부모 잃은 삶… “산송장처럼 지냈다” = 박 당선인은 22살이던 1974년, 8·15 경축행사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프랑스 유학 중 급거 귀국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찬바람이 불었다… 한동안 산송장처럼 지냈다”고 할 만큼 생의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결심하고 이후 5년간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절 박 전 대통령에게서 보고 배운 정치관과 국가관, 안보관 등은 정치적 근간이 됐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마저 김재규의 총탄에 잃는 비극을 맞는다. 피격 상황을 전해 듣고 “전방에는 이상 없나요”라고 묻는 등 냉정한 현실 판단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 사건은 그에게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을 남겼다. 박 당선인은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그해 11월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청와대를 나왔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채.
◇ 정치 입문… “국민 고통 지켜볼 수 없어” = 박 당선인은 “흉탄에 부모를 잃은 뒤 평범한 삶을 바랐다”고 했다. 실제로 아버지 서거 후 8년여간 은둔생활을 했다. 1988년부터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는 등 공개 활동을 통해 박 전 대통령 명예 회복에 힘쓰기도 했지만 1990년엔 근령씨와의 갈등으로 육영재단 이사장을 그만두고 다시 칩거에 들어갔다.
정치입문 계기는 1997년 닥친 IMF 경제위기였다. 그는 “국민들의 땀과 눈물로 이룩해 온 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무너지고 국민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 없었다”고 했다.
1997년 12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에 입당한 그는 이듬해 4월 치러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달성대첩’에 나서 안전기획부 기조실장을 지낸 거물 엄삼탁 후보를 누르고 국회에 입성했다.
올해 19대 총선에서 5선 고지를 넘고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15년 정치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는 ‘선거의 여왕’이란 타이틀을 얻기까지 굴곡진 순간의 연속이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거세던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천막 당사를 짓고 붕대 투혼을 벌여 121석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선거의 여왕’으로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때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지원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한 후 침착함을 잃지 않은 모습은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됐고, 병상에서의 “대전은요” 발언이 전해지면서는 박빙의 대전 판세가 뒤집혔다.
이 테러 사건은 그의 삶에서 또 한 번의 중대 전환점이 됐다. 이 사건 후 그는 “지금의 인생은 덤이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저를 다시 일으켜 준 국민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제2의 인생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2007년, 대권도전을 선언한다.
◇ 설욕의 5년 거쳐 대권재수… “마지막 정치여정”=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은 사실상 결승전과도 같았다. 박 당선인은 이명박 후보와의 일전에서 일반당원·대의원·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이겼지만 여론조사에서 뒤지면서 1.5%포인트 차로 석패했다.
당시 그는 “경선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자.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을 걸려서라도 잊자”라며 ‘아름다운 승복’의 모습을 보여 또 한 번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듬해 치러진 2008년 총선부터 박 당선인과 친박(친박근혜)계 인사들은 수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공천 학살’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친박계는 공천에서 배제됐고 그는 수족을 잃었다.
박 당선인은 이후 ‘여당 내 야당’과 같은 존재로 이명박 정부와 거리를 유지했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이 거셌던 때엔 정부에 전면으로 맞서 원안을 지켜냈다. 이는 박 당선인을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만들기도 했다.
대선 재수생으로서 ‘대세론’을 이어가던 그는 2011년 당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계획보다 빨리 전면에 재등장한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삽입해 정강을 개정하는 등 당을 리모델링했고, 패색이 짙던 19대 총선에서 148석을 얻는 대승을 이끌어냈다.
‘마지막 정치여정’으로 18대 대선에 나선 그는 무난히 당내 경선을 통과하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상대로도 승리,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비로소 완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