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기록의 나라에서 삭제의 나라로- 정영진 방송인·시사평론가

입력 2013-07-2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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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 우리보다 많은 나라다. 유구한 역사의 그리스나 이탈리아, 중국이나 이집트도 세계기록유산만큼은 우리보다 적다. 우리나라가 전인류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은 기록물들이 많다는 것. 그 가운데에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 5400만자에 달한다. 실록의 가치는 방대한 양에만 있지 않다. 실록은 아들을 죽인 왕도, 왕비에게 사약을 내린 포악한 왕도 사관 외에는 사초에 절대 손을 대지 못했다. 사초의 내용을 누설한 사관은 사형 또는 사형에 준하는 중벌을 받기도 했다.

객관성과 공정성에도 큰 힘을 썼다. 먼저 춘추관 시정기나 승정원 일기 등에서 뽑은 사실로 초초(初草)를 작성했다. 이어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중초(中草)를 작성했다. 그러고도 오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실록인 정초(正草)를 만들었다. 보관도 철저했다.

2007년 남북 정상 간의 대화록이 결국 사라졌다. 전산시스템을 설계한 민간전문가까지 투입돼 찾았지만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니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부는 물론, 여야 할 것 없이 이 사태에 대해 국민 앞에서 반성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화록을 삭제했다며 이른바 ‘사초 논란’에 불을 지폈고, 야당은 이명박 정부가 국가기록원장, 국정원장 등과 짬짜미 해서 빼돌린 것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 와중에 이지원 시스템의 봉인이 누군가에 의해 해제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화록을 작성했다는 핵심 실무자는 이 판국이 되도록 두문불출 ‘나 몰라라’다.

국가기록원이 만약 조선시대에 사초를 관리하던 기관이었다면 당장 모든 직원이 중벌을 받았을 것이다. 이 중요한 기록을 보자고 달려들던 국회의원들도 생명을 부지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녹취 파일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높임말로 장난질(?)을 한 국정원 담당 직원 역시 중벌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나라가 철저한 ‘기록의 나라’에서 정상간 대화록까지 깨끗이 지워버리는 ‘삭제의 나라’가 됐을까. 이 중요한 역사적 기록들을 이토록 허술히 다루는 우리를 보며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또 3백년쯤 지나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다시 선정하는 날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기록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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