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 이후 안보와 외교정책에서도 그의 원칙론은 확고하다. 일본에 대해서는 과거사 문제의 선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미국에 이어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의 선해결을 내세워 취임 이후 6개월이 다 되도록 정상회담 일정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아베 신조 정부의 우경화가 양국 관계 악화의 원인이다. 아베 정부는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이후 궤변과 망발로 주변국들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아소 다로 부총리가 ‘나치식 개헌’을 언급했는가 하면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축구 한일전에서 붉은악마가 내건 현수막 내용을 문제 삼아 한국민의 민도를 언급하는 상식 이하의 태도를 보였다.
또 정부 차원에서 독도에 관한 첫 국민여론조사 결과 발표,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의 사용 공식화, 항공모함 이즈모 진수 등 종전일을 앞두고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대일 외교정책에 있어 박 대통령의 원칙이 더욱 확고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도 그의 원칙은 확고하다. 북한의 재발방지 약속이 없다면 개성공단 폐쇄도 불사하겠다는 초강수가 마침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북한이 공단 가동중단에 대한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재발방지 약속을 한 만큼 책임을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여야 간 경색된 정국도 돌파구를 찾은 듯하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단독 영수회담을 제의한 데 대해 청와대는 여야 대표와 원내대표가 모두 참여하는 ‘5자 회담’을 역제안했고, 김 대표는 재차 단독회담을 제의하는 등 샅바싸움의 양상이지만 양측 모두 대화 의지는 밝힌 셈이다. 기왕에 대화할 생각이 있다면 박 대통령이나 김 대표는 2자든, 3자든, 5자든 형식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특히 김 대표가 그동안 “형식과 의전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과 만나겠다”고 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대화의 장에 나서는 게 옳다. 국가정보원에 대한 국정조사와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등으로 촉발된 경색 정국으로 국회에 계류된 각종 법안들이 4500여건에 달하는 데도 국민적 호응이 없는 장외투쟁에 매달리는 건 국민을 도외시한 처사다.
박 대통령도 보다 유연한 자세로 변할 필요가 있다. 북한과 민주당이 퇴로를 찾고 있는 만큼 탈출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게 옳다. 관용은 힘 있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5일 단행된 청와대 비서실 인사는 심히 우려스럽다. 대화와 타협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제왕적 통치를 위한 포석인 때문이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에서조차 과거 군사정부 시절의 ‘육법당’이라거나 ‘육법정부’라고 할 정도다.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해 박준우 정무수석, 홍경식 민정수석 등 서울대 법대 출신 3명이 새로 청와대에 합류했다. 여기에 경호실장, 안보실장과 남재준 국정원장은 육사 출신이다. 여당인 새누리당의 황우여 대표는 서울 법대 출신이며 정홍원 국무총리는 검사를 지낸 법조인이다.
청와대 측은 “안보와 법치, 원칙, 능력 등을 중시해 인사를 했는데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박 대통령의 DNA에는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술이 고스란히 각인돼 있다고밖에 보기 어렵다.
육법 출신이라서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육사 출신들은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하고, 법조인들은 법 논리에 충실해 시대정신이나 수시로 변하는 민심을 읽지 못한다는 특질이 있어 원칙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과 궁합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원칙이 독선으로 흐르더라도 요령부득한 육법 출신 참모들은 자기 목숨이나 자리를 걸고 간언(諫言)했던 옛날 명재상들과는 달리 묵묵히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할 것이라는 건 불문가지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소통과 타협도 필요하다. 대일 문제는 국가적 자존감은 물론 독도라는 영토분쟁이 있는 만큼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는 게 옳다. 그러나 북한이나 민주당과의 회담은 다르다. 회담의 형식이나 문구의 구체적 표현 등 지엽적인 문제에 얽매여 산통을 깨서는 안 된다. 지금은 박 대통령의 통큰 정치와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