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하마르올림픽홀. 열여섯 살 어린 소년의 가슴엔 태극기가 선명했다. 그러나 긴장한 소년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릴 뿐이었다.
“탕!” 정적을 깨는 출발 총성이 울렸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빙판을 지치기 시작했다. 소년의 눈앞에는 올림픽 메달이라는 외길이 펼쳐졌다. 외롭고 힘든 레이스였지만 도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소년은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 이규혁(36)이다.
그는 2014 소치동계올림픽에서 6번째 올림픽을 맞이한다. 사격 이은철, 스키 허승욱, 핸드볼 윤경신, 오성옥이 다섯 번의 올림픽을 경험했지만, 여섯 번째 올림픽은 동·하계를 통틀어 이규혁이 처음이다. 1994년 릴레함메르부터 소치까지 오로지 올림픽 메달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의 목에 걸린 메달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소치동계올림픽은 남들과 다르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돌아보면 힘든 일이 너무 많았다. 특히 2010년 밴쿠버 때는 힘든 기억밖에 없다. 모든 것을 밴쿠버에 쏟아내며 집중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재도전은 생각도 못했는데…”
이규혁의 목소리는 의외로 편안했다. 4년 전 떨리던 목소리도,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던 여린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이라는 결심이 굳어서다. 이번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도 예년과 달랐다. 2013-2014 시즌 국제빙상연맹(ISU) 월드컵 1~4차 대회까지 500m 랭킹 43위, 1000m 랭킹 37위로 6회 연속 동계올림픽 출전에 턱걸이했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다. 어린 후배들과 비교하면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도 많이 부족하지만 올림픽 메달을 향한 내 마음은 20년 전과 다르지 않다. 이젠 올 때까지 왔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살리고 싶다.”
이규혁이 이처럼 편안한 마음을 갖기까지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다. 그에게 다섯 차례 올림픽은 그야말로 잔인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출전 때마다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서 주목받았지만 메달 주인은 따로 있었다.
“정말 힘들었다. 올림픽이 끝나면 항상 은퇴를 생각했다. 그러나 올림픽 후에는 꼭 우승을 하거나 세계신기록을 세워서 다시 시작하게 됐다. 힘들 때마다 터진 우승과 세계신기록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또 힘들 때마다 응원해준 사람도, 질타하는 사람도 많았다. ‘올림픽에 왜 나가냐’는 사람도 있고, ‘그 경기력으로 왜 그렇게밖에 못 하냐’고 질타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됐다.”
무엇보다 이규혁의 메달 전망이 관심사다. 스피드스케이팅 단거리는 변수가 많은 종목이다. 이규혁의 주 종목인 500m는 더 그렇다.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규혁은 더 이상 우승 후보가 아니다. 간신히 올림픽 티켓을 획득했을 만큼 여섯 번째 올림픽은 출전 자체에 의미가 있다.
“예전처럼 메달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래서인지 나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줄었다. 그 점이 4년 전과 비교해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화, 모태범 같은 후배들이 너무 잘해서 소외되는 기분도 든다(웃음). 하지만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그만큼 발전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대견하고 뿌듯한 마음이다.”
결국 이규혁에게 소치는 은퇴 무대다.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은퇴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체력적인 한계, 후배 선수들의 선전이 그가 빙판 위에서 내려올 때가 됐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규혁은 은퇴 후 학업에 전념할 계획이다.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아직 진로는 정하지 않았지만 같은 팀 소속 후배 이상화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현재 이상화 선수와 서울시청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다.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내 운동을 하면서 이상화 선수의 운동을 봐주고 있다. 은퇴 후에도 이상화 선수가 선수생활을 마칠 때까지는 도움을 주고 싶다.”
이제 올림픽까지 15일. 결전을 앞둔 이규혁은 소치에서 모든 것을 쏟을 각오다. 20년간 올림픽 노메달 한을 풀고 다시 한 번 눈물의 인터뷰를 재현할 수 있을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