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학동에 사는 김은경(29·가명)씨는 1년 넘게 다니던 은행을 얼마 전 관뒀다. 2004년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 영업창구 업무에 잔뼈가 굵은 그녀였지만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견디기 힘들었다. 김씨는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처우도 좋아졌다고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면서 “업무상 내 실수도 아닌데 덮어씌우기 일쑤고, 괜히 미운털 박혀서 재계약을 못할까봐 제대로 항변하지도 못한다”고 토로했다.
현재 우리나라 비정규직 근로자는 600만명에 육박한다. 계약직이란 이유만으로 매일같이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정부가 앞세운 양질의 일자리 정책은 멀고 먼 남의 나라 얘기다. 경영계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노력을 지속하고 있지만 노동계의 불만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비정규직 근로자들도 회사를 위해 힘들게 일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만 한번에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줄지 않는 비정규직, 성별 편차도 커 = 비정규직이란 파견근로, 단시간 근로, 계약직, 도급, 위탁, 특수고용계약직에 종사하는 근로자를 의미한다. 유형별로는 고용의 지속성, 근로시간, 근로제공방식에 따라 한시적 근로자, 시간제 근로자, 비전형 근로자로 분류한다. 이중 비전형 근로자는 파견, 용역, 재택, 일용직 근로자를 말한다.
고용노동부,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 규모는 2004년 539만4000명을 기록해 처음으로 500만명을 넘어선 후 10년째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 임금근로자 대비 비정규직 비율 역시 2004년 30%대에 진입한 뒤 소폭의 등락만 거듭하며 고착화되고 있다.
2013년 8월 현재 우리나라의 임금근로자 총 1824만명 중 비정규직 근로자는 594만6000명으로 지난해 591만1000명보다 0.6% 증가했다. 남녀 성별로는 여성이 남성(46.4%)보다 많은 53.6%를 차지했다.
임금근로자의 2013년 6~8월 월평균 임금은 218만1000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10만4000원보다 7만7000원(3.7%) 증가했다. 정규직의 경우 254만6000원으로 8만6000원(3.5%) 올랐고, 비정규직은 142만8000원으로 3만5000원(2.5%) 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격차는 지난해 8월 기준 11.8%로 전년 대비 1.2%포인트 더 벌어졌다.
◇5대 쟁점 둘러싸고 노사 간 극한 대립 예고 = 비정규직 문제는 오랜 기간 경영계와 노동계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올 봄 노동계의 대규모 춘계투쟁을 앞두고 노사 간 팽팽한 긴장감도 감지된다.
비정규직을 둘러싼 5대 쟁점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원청 기업의 하청 근로자 직접 고용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 △특수고용 노동자 기본권 강화 △고용 안정 및 임금 수준 현실화 등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관계자는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라며 “덤프트럭 운전자, 퀵서비스 기사 등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는데도 산업재해보험이 온전하게 적용되지 않아 사고 발생 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한 덤프트럭 기사가 공사장 인부를 숨지게 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 산재보험을 인정한 근로복지공단이 사고를 낸 기사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면서 “작업 도중 신체 절단 사고가 나더라도 보상금 한 푼 못 받는 게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경영계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처우 개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노동계의 논리 비약이 심하다며 맞서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제품 수급의 변동성은 항상 존재하는 만큼 비정규직은 어쩔 수 없는 근로 형태”라며 “필요에 의해 채용하는 기업 입장에서 우수인력 확보를 위해 처우 개선에 적극성을 띠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또 “하청 근로자의 비정규직 문제는 해당 기업에서 풀어야 할 숙제인데 원청 기업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비정규직을 악의적으로 이용해 일부 기업에서 발생한 문제를 반기업 정서를 자극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