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대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나이 50세에 우의정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종9품의 미관말직을 받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요즘의 국토해양부 9급 공무원에 임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연암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그는 64세에 이르러 양양부사에 올랐는데 15년 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종3품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학자이자 초서로 유명한 미수 허목(1595∼1682)도 56세 때 처음으로 최하 말직인 참봉(종9품)의 벼슬을 받았고 80세에 이르러 참판(종2품)에 오를 수 있었다. 명재 윤증(1629~1724)은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상징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36세 때 처음 종9품인 내시교관에, 53세에 성균관 사예(정사품)에 임용되었지만 관직을 받지 않았고 68세에 이르러 공조판서를 내렸는데 그래도 나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보듯이 조선시대에는 대학자여도 종9품에서 관직을 시작하는 게 관행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최말단인 종9품에 임용되었다. 요즘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5급 공무원이 되고 경찰대를 나오면 곧바로 파출소장에 임명하는 것도 난센스다. 인재가 많지 않았던 개발도상국 시절에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요즘처럼 인재가 넘쳐나고 전문가나 경력자가 홍수인 시대에는 5급 공무원 시험이나 경찰대의 파출소장 임명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학 교수를 장관으로 임명하는 게 관행처럼 돼 있지만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교수가 아니어도 인재들은 널려 있다.
백곡 김득신(1604~1684)은 무려 59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과거시험은 요즘 사법고사나 행정고시 공부하는 것보다 더 경쟁이 치열했다. 3년에 한 번씩 보는데 단 70명 정도밖에 뽑지 않았다. 대부분 30대까지 과거시험에 응시하다 계속 떨어지면 포기를 하는데 김득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거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과거시험을 때려치우라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