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여인들은 명품을 좋아해.
재벌가의 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명품사업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브랜드나 매장을 관리하는 것부터 직접 해외를 돌아다니며 명품업체들과 담판을 지어 물품을 구매하고 국내 런칭까지 한다.
아예 명품 백화점을 운영하고 해외수입브랜드를 인수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재벌가의 딸들이 명품사업에 적극 나서는 숨은 사연은 무엇일까?
'명품이 곧 경쟁력이다'
재벌가 딸들이 명품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에 대해 관련업계가 말하는 공통된 대답이다.
롯데백화점 명품 사업팀의 한 관계자는 “장기간의 해외유학을 통해 배운 국제적 감각과 꾸준히 사용해 온 명품에 대한 안목 등이 실무에 적용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명품'이라는 것이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제품은 아니지만 재벌가의 딸로 자라오면서 손쉽게 명품을 써왔던 경험을 십분 활용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다. 한마디로 명품은 써 본사람이 안다는 얘기다.
◆경쟁력 첫째...빼어난 미모와 명품에 대한 안목
지난 3월 24일 오후 6시. 개장 1주년을 하루 앞둔 이날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 9층에서는 조촐한 칵테일 파티가 열렸다. 에비뉴엘 개장 1주년을 기념해 에비뉴엘 VIP와 롯데백화점 VIP 고객 등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단연 화제가 됐던 이가 빼어난 외모와 세련된 패션감각을 보여준 장선윤 에비뉴엘 담당 이사(35)였다.
장 이사는 지난해 개장축하 파티에서 민소매 실크 브라우스를 입고 나와 주위의 시선을 한눈에 끌었다.
재벌가의 여인이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일이 거의 없었던 터라 장 이사의 패션감각과 연예인 뺨치는 외모는 금방 화제가 됐다.
장 이사는 신격호 롯데 회장의 외손녀이자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의 딸이다.
삼성가도 마찬가지다. 이건희 회장의 둘째 딸이자 제일모직 패션정보실 부장(상무보)인 이서현씨(34)도 단아한 외모로 정평이 나있다.
이 상무보의 패션감각에 대해 제일모직의 한 관계자는 “레이어드 룩, 클리비지 룩 등 같이 시시각각 변하는 최신 해외유행 트렌드를 쫓지만 정작 자신은 미니멀리즘이 결합된 보수적 형태를 유지한다”고 전한다.
공교롭게도 명품사업을 펼치고 있는 재벌가 딸들은 대부분 뛰어난 외모와 패션감각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있다.
현금 많기로 솜분난 대성그룹 김수근 전 회장의 막내딸인 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사장(48)도 모델 버금가는 큰 키(176cm)와 귀 위까지 짧게 자른 쇼트컷(Short Cut)이 트레이드마크다. 덕분에 공식석상에서 언제나 톡톡 튀는 외모로 주위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비즈니스 미팅을 제외하곤 청바지도 즐기는 캐주얼 스타일이다.
김 사장 스스로 패션을 즐기기 때문에 외국에서 들여오는 여성 브랜드는 직접 입어 보고 피팅감이나 옷매무새를 확인해 한국인에게 적절한지를 시험해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재벌가 딸들답게 패션에 대한 고급취향도 명품사업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외동딸인 정유경 조선호텔 프로젝트 실장(상무·35)은 명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유명하다. 신세계의 효자 브랜드인 조르지오 아르마니, 캘빈 클라인, 돌체 앤 가바나 등을 직접 챙길 정도다.
고급 취향을 살려 제품 바잉(buying)과 매장 윈도우 디스플레이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백화점을 운영하는 집안 내력을 이어받아 패션 명품쪽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성인이 되어 자연스럽게 사업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게 회사측의 설명이다.
장선윤 이사는 이미 롯데쇼핑의 명품사업 분야를 사실상 도맡다 시피 챙기고 있다. 그는 지난해 개관한 롯데 명품관 `에비뉴엘'의 개점과 성공적인 안착을 주도해 지난 2월 이사대우에서 이사로 승진했다.
1997년 6월 롯데면세점에 입사한 그는 98년 2월부터 롯데쇼핑 해외상품팀 바이어로 시작해 명품 1팀장을 거쳤고 에비뉴엘까지 맡는 등 그룹내 명품사업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장 이사가 선호하는 명품 브랜드는 샤넬과 루이뷔똥으로 알려져 있다.
패션사업 특히 명품 사업에도 ‘미(美)’에 대한 감각은 필수 조건이다. 자신을 가꾸는 것을 싫어하는데 어떻게 남을 꾸며 주는 사업을 펼칠 수 있겠느냐는 게 이 바닥의 정설이다.
패션업체의 한 관계자는 패션분야는 옷을 보고, 즐기고, 평가할 수 있는 '끼'를 갖춰야 하는데 일반인들은 고가의 명품에 쉽게 접근할 수 없지만 재벌가의 여성들은 이 재량을 펼치기에 배경 면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말한다.
◆경쟁력 둘째...해외유학 경험·유창한 외국어 구사
사실 명품사업을 펼치기 위해선 유창한 외국어 구사력도 필수다. 콧대 높은 외국 업체의 명품을 국내로 가지고 오기 위해선 그들과의 친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폭넓은 인맥과 국제적인 매너도 매우 중요하다.
재벌가의 딸들은 대부분 오랜 해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VIP급 인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는 미국의 유명 패션 스쿨인 파슨즈 출신이다. 뉴욕에 위치한 파슨즈는 비싼 학비와 함께 뛰어난 졸업생들로 유명하다.
패션을 기본으로 음악, 미술 등 예술분야로 특화시킨 이 학교 출신자 중에는 패션 분야를 제외하고도 영화 '배트맨'으로 유명한 조엘 슈마허 감독과 가수 이현우가 있다.
이 상무와 파슨즈의 인연 덕분에 제일모직은 현재 파슨즈와 커리큘럼과 학점을 공유하는 삼성디자인학원(SADI)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곳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후 일본에서 어학연수까지 마친 이 상무보는 영어와 함께 일어까지 유창하다.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한 만큼 양국 브랜드에 특히 관심이 많아 미국의 ‘케네스 콜’과 일본 고가 브랜드인 '이세이 미야케' 등을 도입해 화제를 모았다.
이 상무보는 명품 브랜드를 도입하는 것과 함께 제일모직의 여성복분야에도 관심이 많다.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디자이너 이정민 상무보와 국내 디자이너 정구호 상무보를 영입하면서 30대 젊은 피를 수혈했고 일본 전 월드사 부사장인 이케가비 마사토시도 스카우트하는 수완을 발휘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장선윤 롯데쇼핑 이사도 유학파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를 나와 완벽한 영어 구사력과 세련된 비즈니스 매너로 구찌그룹의 도미니코 데졸레 회장과 로즈 마리 브라보 버버리 회장 등 해외 명품업체 최고 경영자들을 직접 만나 비즈니스를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잠실점의 ‘펜디’'티파니’와 대구점에 ‘루이뷔똥’과 ‘샤넬’ 등을 유치한 장본인이다.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 역시 유학파다.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로드아일랜드디자인학교를 졸업했다.
현재는 회사 디자인 업무를 맡고 있지만 명품사업에 대한 관심은 놓지 않고 있다. 롯데를 따돌리고 매머드급 브랜드인 루이뷔똥을 본점에 입점시킬 수 있었던 것도 정 상무의 숨은 노력 덕분이라는 게 회사측의 주장이다.
영국 사라 퍼거슨 전 왕세자비 결혼 때 부케를 맡아 유명해진 꽃집 '제인 파커'를 아시아 최초로 조선호텔에 들여왔는가 하면 신세계백화점에도 입점시켰다. 또 국내에 수입 멀티숍 바람을 일으켰던 신세계인터내셔널 '분더샵'(명품 편집매장) 도입도 정 상무가 주도했다.
특히 최근 50억원의 유상증자를 하고 내년 초 본격적인 영업을 추진 중에 있는 '신세계첼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첼시 그룹과 합작해 설립한 `신세계첼시`는 고가의 명품 재고물량을 저렴한 값에 판매하는 대규모 매장으로, 일반 제품이 아닌 명품을 취급한다는 점에서 개장 전부터 주목을 받아오고 있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핸드백 ‘MCM’과 중년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막스&스팬서’를 도입한 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사장도 오랜 해외생활이 가장 큰 무기다.
김 사장도 미국 암허스트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해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미국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서 소매 유통업 실무를 익힌 뒤 귀국해 지난 91년 한국에 성주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다수의 명품 브랜드를 한국에 소개했다.
10년이 넘는 해외생활 덕분에 막힘없는 영어 구사력으로 해외비즈니스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지난 2001년에는 <아시아 위크>에 의해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쟁력 셋째...일에 대한 악착같은 열정
이들 재벌가의 딸들은 일에 대한 열정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대표적인 예가 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사장. 재벌가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후광을 벗어 던지고 고생스러운 유학생활을 택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버드대학 동문이었던 캐나다인과 결혼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김 사장은 재벌가의 딸들 중에 대외적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영활동은 물론 수익금의 10%를 사회에 환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기도 한다.
의례적으로 재벌가의 2~3세들은 언론은 물론 대외적인 노출을 극히 꺼리는 반면에 자수성가한 쪽에 속하는 김 사장은 일에 대한 악착같은 열정 외에는 털털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한다.
직원들은 수시로 사장실의 원탁회의 테이블에서 사장과 격의없이 회의를 열곤 했고 잦은 출장으로 사장실이 자주 비어도 직원들의 출입은 여전히 자유롭다. 김 사장의 경영철학을 넘어 평소 소탈하고 합리적인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랜 해외생활 덕에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악수를 청한다. 외환위기 시절 사업장을 축소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현재는 연매출액 700억원대를 유지하는 견실한 기업을 키워 나가고 있다.
패션 마케팅 리서치와 패션 기획 등을 주 업무로 하고 있는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도 일에 대한 욕심이 남다르다. 제일모직에서 출시하고 있는 여성복을 수시로 입고 다니며 직접 품평을 하기도 한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업무에선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지만 사석에선 동료들과 말도 많이 하고 잘 웃는 스타일”이라고 평가한다.
직설적인 성격의 언니(이부현)가 신라호텔의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과 달리 묵묵히 자기업무에 충실히 하는 학구적인 타입인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주변 사람 이야기를 경청하는 신중한 성격이다. 또 남편, 4살 난 딸과의 가정생활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게 지인의 전언이다. 섬세하며 과묵하다는 평을 받는 아버지 이건희 삼성 회장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업무스타일이 아버지보다 어머니쪽을 닮은 딸도 있다.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딸인 정유경 상무는 어머니의 강력한 추진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평이다. 특히 까다롭고 여성답지 않은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한다. 본인이 워낙 인테리어, 디자인, 패션에 대한 정보가 많고 감각도 뛰어나 직원들의 어수룩한 자료에는 호통을 치기까지 하는 여장부 스타일이다.
명품사업을 하면서 만나는 콧대 높은 명품업체의 비즈니스 파트너들도 꼼꼼히 준비한 데이터를 활용해 제압하는 편. 절대 ‘맘에 든다’ ‘좋다’란 말도 않고 내색도 하지 않는다. 지난 해 딸의 돌잔치 때도 그릇 하나까지 직접 챙기는 깐깐한 실력을 발휘해 주변을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반면 롯데의 장선윤 이사는 무색무취의 스타일로 유명하다. 돌출된 언행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만 열심히 하는 모범생유형이다. 하지만 1년만에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명품백화점인 에비뉴엘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