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이 세운 고려시대 여성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려시대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 중 한분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처인 정신택주(貞愼宅主, 1331-1394, 정신택주는 조선시대의 정경부인에 해당하는 부인에게 주는 일종의 관직) 권씨를 통해 고려시대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자.
이색은 14세 때, 11세의 당대 명문대가인 안동 권씨 권중달의 딸과 결혼했다. 이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이미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한다. 개경의 명문가에서는 이색을 사위로 삼기위해 혼인날 저녁까지 다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능력 있는 사위를 얻고 싶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일이겠으나 특히 고려시대에서는 더하였다. 즉 친족구조가 친가뿐만 아니라 처가와 외가도 중요시되고, 사위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의 영욕을 함께했기 때문에 똑똑한 사위는 ‘가문의 영광’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혼하면 처가에서 사는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
결혼한 이색과 정신택주 권씨는 신접살림을 처가에서 시작했다. 당시 혼인풍속은 서류부가라 하여 사위가 처가에서 머물다 뒤에 시집으로 가는 처가살이 형태였다. 이색은 혼인 후 원나라에 유학을 갔고, 고려와 원나라 양국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원과 고려 양국을 오가며 벼슬을 하였다. 이색 부부는 뒤에 처가에서 분가를 하였으나 이색의 문집에는 처가의 제사나 혼인식, 장례식에 참석하고, 동서나 매부와 자주 교류했던 내용이 보인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서류부가 혼인 풍속으로 혼인 뒤에 꼭 시집에 갈 필요가 없고, 친정 부모를 모실 수도 있어 출가외인(出家外人)이라는 관념이 적었다. 혼인 후에도 딸이 부모를 모실 수도 있어 딸도 아들 못지않게 자식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다.
후일 조선 건국의 핵심인물이었던 정도전은 “여자들이 친정에서 혼인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 부모세력을 믿고 남편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군다”며, “혼인풍속을 중국처럼 ‘시집살이’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친정부모와 외조부모의 제사도 지내
정신택주 권씨는 혼인 후에는 당시대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고 부지런함으로 집안 일을 하고, 친척을 두텁게 접대하고, 자손을 자애롭게 가르치고, 예법에 따른 행동을 했다”는 내용이 묘비명에 새겨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제사는 특이하다. 제사의 대상은 시부모만이 아니라 친정부모와 외조부모도 포함되었다. 또 조선시대처럼 집집마다 사당을 설치하고 맏아들 집에서 부계친족끼리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절에서 재(齋)의 형태로 치렀다.
이색, 권신택주 권씨 부부는 고려말 조선초기의 격변의 소용돌이에서 이색부자가 유배를 당하고, 첫째와 둘째 아들이 살해되는 고통을 겪었다. 다만, 셋째 아들만이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하였다. 1392년(태조1년)에 이색부부는 고향 한산의 시골집으로 내려왔으나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병이 들었다. 2년 후 정신택주가 죽음에 이르렀고, 이색도 2년 후에 뒤를 따랐다.
제6강=묘지명을 통해 본 고려 여성(권순형,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제공=(사)역사․여성․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