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합병(M&A)의 달인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달 초 미국에서 쓰라린 실패를 맞았다. 지난해 인수한 미국 3위 이동통신업체 스프린트와 4위 T모바일US를 합병해 미국시장에서 부동의 지위를 구축할 계획이었으나 결국 T모바일 인수를 포기한 것이다.
손 회장에게 고배를 마시게 한 배후에는 톰 휠러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과 존 레저 T모바일US 최고경영자(CEO)가 있었다며 숨겨진 내막을 21일(현지시간)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휠러 위원장은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수해 미국에서 로비활동이 처음인 소프트뱅크가 그의 진의를 알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평가다.
FCC는 위원장을 포함한 5인의 위원으로 구성돼 일반적으로 위원장이 다른 위원의 의도를 사전에 파악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위원장의 의향이 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휠러는 이런 교섭을 하지 않아 소프트뱅크로서는 방향을 잡기가 힘들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그의 진의가 밝혀진 것은 지난 1일이다. 당초 휠러 위원장은 워싱턴 정가에서 통신사들을 위한 로비스트로 활약해왔고 지난 2011년 AT&T가 T모바일 인수를 시도했을 당시 찬성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손정의도 나름 기대했다. 그러나 당시 휠러 위원장은 FCC 관계자들에게 메모를 돌렸다. 메모의 핵심은 2015년 예정된 미국 이동통신 주파수 경매에서 상위 4개사의 공동 입찰을 금지하겠다는 것. T모바일과의 공동 입찰을 전제로 인수협상을 해 온 스프린트에 협상 중단을 강요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신문은 풀이했다.
손 회장의 꿈을 막은 다른 한 명은 인수 대상인 T모바일의 존 레저 CEO다. 그는 지난달 실적 발표 당시 스프린트와 인수 협상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스프린트가 타사(T모바일)의 뒤를 좇아 가격을 인하하는 것은 안 된다”며 “가격경쟁은 스스로 걸어야 한다”고 스프린트의 마케팅전략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렇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괴짜가 존 레저라는 인물이라고 신문은 설명했다. 그는 공공장소에 항상 T모바일 로고가 들어간 밝은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등장한다. 이는 정장 차림이 주류인 보수적인 통신업계에서는 이색적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1월에 개최된 ‘소비자가전쇼(CES)’에서는 AT&T가 열린 파티에 초대장없이 나타나 쫓겨나기도 했다.
이런 기발한 행동이 T모바일 지명도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실력도 좋다. 그가 2012년 CEO에 취임한 이후 빈사 상태였던 T모바일은 ‘강한 4위’로 거듭났다고 신문은 전했다.
지난 1분기 신규 계약 건수 증가폭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스프린트는 T모바일의 약진에 가입자를 빼앗기면서 더욱 피폐해졌다.
이에 FCC 등 감독기관 사이에서는 “‘약한 3위(스프린트)’가 ‘강한 4위’를 인수하는 것은 미국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확산했다고 신문은 설명했다.
손 회장이 일본에서 일으킨 변화를 미국으로 확산시키려 했지만 이미 레저 CEO가 선수를 친 셈이라는 평가다.
손 회장의 무대는 일단 막을 내렸으나 세계 이동통신시장은 여전히 M&A 기운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T모바일 인수전이 다시 막을 열 수 있다고 신문은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