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지난 봄 홈디포에서 현금카드를 사용한 기록이 있습니다. 동의하신다면 오늘부터 현금카드 사용을 정지할 수 있습니다.”
상담원의 말을 듣자마자 한국에서 익숙했던 보이스피싱의 그림자가 밀려왔다. 몇 달 전 쓴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상담원의 말이 이어졌다. “최근 홈디포 사태와 관련해 고객님의 현금카드 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말이라 현금카드 재발급은 어렵지만, 오늘 사용을 중지하고 평일에 재발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봤다. 지난 3월 말 뉴욕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사회보장번호 발급에 앞서 주거래 은행을 만들고 현금카드를 받았다. 집을 구한 뒤 이것저것 살림을 마련하기 위해, 홈디포에서 현금카드로 물건을 산 적이 있었다. 벌써 5개월 전 얘기다.
상담원은 통화 내내 기자의 개인정보를 묻지 않았다. 보이스피싱을 걱정한 것은 기우였던 셈이다. “알았다”라고 대답하고, 고맙다며 전화를 끊었다.
홈디포는 미국 최대 주택개량용품 판매업체다. 이달 초 미국 전역의 2200여 점포에서 고객 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제기됐고, 업체 측에서도 이를 인정했다.
기자는 홈디포에서 개인카드로 물건을 구매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거래 은행의 전화가 없었다면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2개월 전에는 평소 자주 이용하는 회원제 할인점에서 전화가 왔다. 이틀 전에 구매한 복숭아와 자두 등 일부 신선제품이 식중독을 일으키는 세균에 감염됐을 수 있으니, 리콜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는 본사의 자동응답메시지 형태였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지역 신문 웹사이트를 통해 해당 업체가 식중독 발생 가능성을 이유로 제품을 리콜했다는 기사를 확인했다.
지역 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리콜을 위해 당장 매장을 방문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자, 상담원은 신선제품이니 먹지 말고 폐기하라면서 나중에 영수증만 갖고 오면 환불을 받을 수 있다고 답했다.
다음 주에 매장 고객센터에 영수증을 제출하고 환불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미국에서 소비자의 권리를 인정받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방인 입장에서 이와 관련한 기업의 대응은 때로는 놀라울 정도다.
홈디포 사태에 따른 은행권의 대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정보 유출 문제는 기업은 물론 소비자 입장에서도 민감한 사안이다. 미국 2위 유통업체 타깃에서는 지난해 700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이로 인해 최고정보책임자(CIO)는 물론 최고경영자(CEO)가 옷을 벗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금융권의 움직임이다. JP모건체이스는 타깃 사태로 정보가 유출된 회원 200만명에 대해 카드 재발급을 결정했다. JP모건체이스는 고객들에게 이메일로 이 사실을 즉각 통보했다. 직원들은 주말도 반납하고 고객을 응대했다. 금융위기 사태로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미국이 여전히 ‘금융 강국’으로 인정 받는 것은 이 같은 ‘고객 제일’의 서비스가 한몫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 기업, 특히 금융권을 종종 돌아볼 때가 있다. 한국의 은행과 카드업계 등 금융권은 외환위기 사태 이후 외형적으로는 성장했을지 모르지만, 소비자들의 만족도는 여전히 높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올 초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카드업계의 대응은 실망 그 자체였다. KB국민카드에서만 530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등 모두 1억건이 넘는 정보가 새어 나갔다.
당시 고객들은 스스로 금융기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정보 유출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금융기관에서 유출된 개인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소비자들이 직접 나선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같은 촌극이 또 없다.
카드사 대표들이 사임하는 등 사태와 관련해 일부 관계자들이 책임을 졌지만, 정작 정보가 유출된 소비자들에 대한 보상과 대책 마련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KB금융 사태를 지켜보는 것이 불편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금융당국의 징계 과정과 임영록 회장 등 관계자들의 처신도 논란거리지만, 소비자들은 안중에 없다는 것에 대한 실망이 크다.
이 모든 것이 더 나은 금융서비스를 위한 것이라면 더 답답할 따름이다. 소비자들에게 KB금융 사태는 관치금융의 폐단 속에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이전투구(泥田鬪狗)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