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노동 현실을 그린 수작으로 평가받는 ‘인간문제(人間問題)’의 작가 강경애(姜敬愛·1906~1944)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듬해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장연(長淵)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게 된다. 열 살이 지나서야 장연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비와 학용품조차 마련하기 힘들
1895년 ‘근대개혁’의 명목으로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단발이 외세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근대’임을 감지한 조선 남성들은 “목은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전통의 논리로 맞섰다. 한편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개화파 남성들에게 단발은 서구식 부국강병을 통해 조선의 미래를 선도하고자 했던 개화파의 메시지였다.
여성의 단발은
박화성(朴花城)은 1903년 전남 목포의 사업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총명한 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작은 집’을 얻자 의절할 만큼 여성적 자의식이 강했다. 목포 정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가고자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충남과 전남에서 교사로 일했다. 전남 영광학교 교원 시절 문학 수업을 시작해 ‘추석전야
정칠성(1897~1958)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이다. 기생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하였다고 하여 소위 ‘사상기생(思想妓生)’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산여성의 계급해방을 위한 투쟁에 평생을 바친 혁명가이다.
1897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녀는 8세라는 어린 나이에 기생이 되었다. 기명은 금죽(琴竹)이다. 경성 대정권번(大正券番) 소속의 기생이었던 그녀 인생의
최은희(崔恩喜·1904~1984)는 1904년 황해도 연백 배천(白川)의 개화 교육자 집안의 5남 5녀 중 5녀로 태어났다. 해주 의정여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류 처분을 받았다. 24일 만에 풀려난 뒤 다시 황해도 연백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6개월 징역
1892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영준(劉英俊· 1892~?)은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北京)여학교 모정서원을 다니면서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귀국하여서는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와 일본적십자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다. 이때 민족사회와 여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회지
일제 강점기 사회운동에서 주목받은 한 여성, 그 이름 봉운! 봉황처럼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다녔다는 뜻일까?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우봉운(禹鳳雲·1889~?)은 정신여학교를 나와 1909년경 대구 계성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중국의 북간도로 가 1912년 가을부터 이동휘(李東輝)가 주도하던 명동촌(明東村)의 삼국전도회에 가입하고, 명동여학교 교사
박현숙(朴賢淑, 1896~1981)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정규(貞圭), 어머니는 최광명(崔光明)이며, 남편은 독립운동가 김성업이다. 1913년 평양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를 졸업한 뒤 전주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며 항일의식과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15년 항일 비밀결사인 송죽결사대를 조
황신덕(黃信德, 호 秋溪, 1898~1983)은 1898년 11월 6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황석청(黃錫淸), 어머니는 전도부인 홍유례(洪裕禮), 언니는 황에스터(황애시덕, 황애덕)이다. 어머니가 난산으로 숨지기 직전이었는데, 캐나다 여성의료선교사 로제타 홀(Rosetta Hall)의 진료로 그를 낳았으며, 이후 온 가족이 기독교인이
함북 명천에서 출생한 허정숙(1902~1991)은 1818년 배화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고베(神戶)신학교 관서학원에 잠시 다녔다. 1920년 중국 상하이의 외국어학교 유학 중 임원근, 박헌영 등 사회주의자와 교류하다 1924년 임원근과 결혼해 첫아들도 출산하였다.
변호사인 아버지 허헌을 존경하며 온갖 보살핌 속에 잘 자란 그였지만, 어려서부터 남녀 불평
여걸 정종명(1895~?)은 우선 겉보기보다 더 서글서글하고 동정심이 넘쳐나는 넉넉한 마음의 전문직 산파(조산원)였다. 뜻을 같이한 첫 남편 신철과 이혼한 후 다른 운동가와도 재혼하였으나 신철이 아플 때는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그런 여성이었다.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도 도맡아 하여 큰누님처럼, 어머니처럼 보살핌으로써 ‘운동계의 대모’라 불렸다. 옥중에서까지 출
영화 ‘암살’의 주인공처럼 알려지기도 한 박차정(1910~1944)! 그는 1910년 5월 8일 경남 동래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1월 자결했다. 어머니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과 사촌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오빠들도 모두 항일 투쟁에 참여한 이 집안은 1918년에 설립된 동래
31세에 요절한 박원희(1897~1928)는 충남 대전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투쟁적이었다. 학교에 안 보내주는 어머니에 맞서 단식투쟁 끝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20년 김사국과 결혼, 다시 일본에서 유학하며 어렵사리 공부하였다.
간도에서 청년교양운동 교사로 운동가로 헌신하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조신성은 평북 의주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총애를 받았지만 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조부 손에 자랐다. 16세에 혼인하였으나 자녀 없이 22세에 아편 중독으로 남편도 죽었다. 서울로 온 그는 상동교회에 다니며 이화에서 공부했다. 이후 소학교 교사, 이화 기숙사 사감을 지냈다.
차미리사와 교류하며 이준과 함께 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주세죽(1901~1953)은 함흥의 사립 영생여학교 고등과에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가해 한 달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 후 병원에서 잠시 근무하다 1921년 4월 상하이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 여학교에서 1년 남짓 영어와 음악을 공부하면서 박헌영을 만나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다. 이때 여운형의 도움으로 박헌영과 혼례도 치렀다.
그는 1924년 5월 정종
구국에 앞장 선 여성들
1898년 북촌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여권통문’은 한국의 여권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들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이므로 똑같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국가가 여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가 여학교를 설립하지 않자 직접 순성여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국채보상운동에서부터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