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辛氏·1367~1382)는 영산(靈山·현재의 경남 창녕군 영산면) 사람인 낭장(郞將) 신사천(辛斯蕆)의 딸이다. 신사천은 만년에 고향에 내려와 퇴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왜구의 침입이 매우 빈번하였다. 왜구는 경제적 곤궁 등의 이유로 1350년(충정왕 2)부터 공민왕 재위 23년간 115회, 우왕 재위 14년간 378회나 고려를 침략하였다. 경상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1315)는 충선왕의 왕비이다. 이름은 보탑실련(寶塔實憐)이며, 원나라 진왕(晉王)의 딸이다. 1296년(충렬왕 22) 충선왕이 세자 시절 혼인하여 1298년 고려에 왔다. 그 해에 충선왕이 충렬왕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공주의 궁을 중화궁(中和宮), 부(府)를 숭경부(崇敬府)라 하였다.
충선왕에게는 계국공주와 혼인
조비(趙妃·생몰년 미상)는 충선왕의 왕비이다. 상원군(祥原郡·황해북도 상원군) 사람으로 아버지는 역관(譯官)으로 크게 출세한 조인규(趙仁規), 어머니는 조온려(趙溫呂)의 딸이다. 1292년(충렬왕 18)에 세자 충선왕과 혼인하였다. 충선왕은 이미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으니, 1289년 혼인한 종친 서원후(西原侯)의 딸 정비(靜妃) 왕씨, 이듬해 결혼한 남양
평량(平亮)의 처(생몰년 미상)는 소감(少監) 왕원지(王元之)의 집 여종이었으며,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金永寬)의 노비였다. 평량은 견주(見州·현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부자가 되었다. 고려시대에 노비는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率居)노비, 따로 거주하는 외거노비로 나뉜다. 외거노비는 소작인 비슷한 존재였다. 즉 주인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
수원 권씨(脩媛 權氏)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의 후궁으로, 법호(法號)는 수원(秀圓)이다. 후궁의 품계 중 하나인 수원(脩媛)은 정2품에 해당된다.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없다. 9세기 중후반에 최치원이 찬(撰)했다고 알려진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를 비롯한 불국사 관련 자료 중 ‘화엄불국사비로
김정란(金井蘭)은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대 여성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원성왕 8년(792) 음력 7월에 신라는 당에 미녀 김정란을 헌상하였다.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김정란은 몸에서 사람을 매혹하는 향기가 났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전한다. 원성왕이 어느 날 황룡사 스님 지해(
계화왕후(桂花王后)는 신라 39대 소성왕(昭聖王, 재위 798~800)의 왕비이고, 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의 어머니이다. 김씨이고, 대아찬 숙명(叔明)의 딸이다. 숙명은 또한 ‘삼국유사’에는 숙명(夙明)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동일 인물이다.
소성왕은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장손이다. 원성왕은 맏아들
성목태후(聖穆太后)는 김씨이고,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맏아들인 인겸(仁謙)의 부인이다. 인겸은 원성왕 즉위 직후인 786년에 왕태자로 책봉되었으나 791년(원성왕 7년)에 죽었다. 이듬해인 792년에 그의 형제인 의영(義英)이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의영 역시 794년에 죽었다. 이에 796년에 인겸과 성목태후의 맏아들인 준옹(
소문태후(昭文太后)는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라고도 한다.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인 김경신(金敬信)의 어머니이다. 소문태후의 배우자, 즉 원성왕의 아버지는 일길찬(一吉飡) 김효양(金孝讓)이다. 소문태후는 박씨로, 창근(昌近) 이간(伊干)의 딸이다. 소문태후의 이름을 ‘삼국사기’에서는 계오부인(繼烏夫人)으로, ‘삼국유사’에서는 인O(
고타소랑(古陀炤娘)은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재위 654~661)인 김춘추(金春秋)의 딸이다. 남편은 이찬(伊?) 품석(品釋)으로, 대야주성(大耶州城, 현재의 경남 합천)의 군주(軍主)였다.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 즉위한 지 11년이 되는 해인 642년에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품석과 그의 처자, 즉
김락(金洛)은 1862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 마을)에서 김진란과 박주 사이에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세칭 ‘사람 천 석, 글 천 석, 살림 천 석’, ‘삼천 석 댁’으로 불릴 만큼 충분히 여유로운 양반 가문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18세에 또 다른 양반 진성 이씨 가문의 이중업(李中業·1863~1921)과 결혼했다.
1896
이화림(李華林·1905~1999)은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이춘실. 숭현소학교에서 육아교육을 공부하였고, 1919년 3·1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역사문학연구회의 일원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청진의 유아원에서 근무하면서 1927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성진·안주 등지에서 학생운동을 하였다.
1930년 3월,
1920년 서울 종로에서 지청천(池靑天)과 윤용자 사이에서 출생한 지복영(池復榮)은 2남 2녀 중 둘째였다. 어머니는 중국에서 항일투쟁 중인 아버지를 만나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복영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 지 장군은 1919년 3·1만세 시위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 및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으로 항일투쟁에 앞
조마리아(趙姓女)는 안중근의 어머니로, “네(중근)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죽는 것이 영광이다…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라고 의연히 말하였다. 의친왕 이강(李堈)이 “세상에 다시 없는 여걸로
이예순은 평산부사 이귀의 딸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김자점의 아우인 유학(幼學) 김자겸과 혼인하였다. 부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두 사람은 혼인 후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라 함께 불도를 닦는 도반(道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김자겸에게는 오언관이라는 서얼 출신의 친구가 있었는데, 오언관은 김자겸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이들 부
광평대군 부인 신씨(廣平大君 夫人 申氏)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신자수(申自守)의 딸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1436년(세종 18)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李璵)와 혼인하였고, 1444년 영순군을 낳았다. 하지만 그해 광평대군이 창진(瘡疹)으로 사망하자, 신씨는 곧바로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혜원(慧園)이었다.
비구니가 된 후
의빈 권씨(懿嬪權氏)는 예조판서 권홍(權弘)의 딸로, 태종의 후궁이다. 조선 왕실 내에서 내명부 직첩을 가진 인물 가운데 최초로 비구니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권씨는 1402년(태종 2) 태종의 후궁 중에서도 처음으로 정식 절차를 거쳐 후궁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애초에 권씨와 가례(嘉禮)를 거행하려 하였으나 원경왕후의 반대로 예식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1440~1521)는 조선의 왕비 가운데 유일하게 비구니가 된 인물이다. 1440년(세종 22)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송씨는 1454년(단종 2) 왕비에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된 이듬해에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했고 곧이어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으로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면서 송씨는 노산군(魯山君) 부인으로 강등되
평원군부인 원씨(平原郡夫人 元氏·1288~1334)는 고려 말의 귀족부인이다. 본관은 원주이며, 할아버지 원부(元傅)는 수상을 지냈고, 아버지 원관(元瓘)은 재상을 지냈으며, 어머니 역시 재상을 지낸 경주 김씨 김신(金信)의 딸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이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원관의 세 번째 처이다. 원관이 처음 홍녹준(洪祿遵)의 딸과 결혼했는데
묘덕(妙德)은 고려 우왕(禑王) 때의 비구니이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경, 직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하 직지로 지칭)’의 출판 경비를 시주하였다.
직지는 1377년(우왕 3) 충청도 청주목의 흥덕사에서 간행되었으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