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봉(宋德峰·1521∼1578)은 경사(經史)와 시문에 뛰어난 여성 문인으로 현재 ‘덕봉집(德峰集)’이라는 시문집을 남겼다. 여기에는 사대부가의 바람직한 여성상, 부부간의 애틋한 정, 가족애, 여성의 잠재적 욕망 등이 담긴 송덕봉의 한시 25수가 담겨 있다. 신사임당·허난설헌과 같은 시대를 살다간 그녀는 허난설헌과 개인적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송
1620(광해군 12)∼1651(효종 2). 조선 16대 국왕 인조의 후궁으로 소현세자를 몰락시키고 김자점(金自點)과 역모를 꾀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아버지는 조기(趙琦)이며, 어머니는 한옥(漢玉)이다. 자녀는 2남 1녀로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효명옹주(孝明翁主)이다.
조 소용(昭容)은 숙원(淑媛)부터 시작하여 소의(
은천옹주(銀川翁主· 생몰년 미상)는 고려 충혜왕의 제4비이다. 본래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로, 단양대군(丹陽大君)의 여종이었다. 사기 그릇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였는데, 충혜왕이 보고 총애하였다. 1342년 은천옹주로 책봉되니 사람들이 ‘사기옹주’라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천민 출신이 어떻게 왕의 후궁이 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경제에 대
순비(順妃·?~1335)는 고려 충선왕의 제6비이다. 양천 허씨로, 아버지는 첨의중찬을 지낸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 어머니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의 딸이다.
허공은 처음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의 딸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낳았으며, 윤 씨가 죽자 다시 최징의 딸과 재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따라서 순비의 형제자매
삼한국대부인 김씨(三韓國大夫人 金氏·1258~1339)는 광산 김씨로 아버지는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지낸 김연(金鍊), 어머니는 추밀원 좌부승지(樞密院左副承旨)를 지낸 유홍(庾弘)이다.
김씨 부인은 선량하고 현명하며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하였다.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부인이 되어서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홍규는 남양 홍씨로,
진혜대사(眞慧大師·1255~1324)는 양천 허씨로, 아버지는 수상을 지낸 허공(許珙), 어머니는 윤관 장군의 후손인 파평 윤씨이다.
14세에 역시 명문가인 언양 김씨 가문의 김변(金賆)과 혼인했다. 그녀는 4남 3녀를 낳았는데, 늘 자식들에게 “남자가 삼가고 경계하지 않으면 음험하고 부정하게 되며, 여자가 삼가고 경계하지 않으면 도리에 벗어나고 편벽해진
고려는 1231년 몽골이 침입해 오자 이듬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이후 40여 년간 항전하였다. 유례없이 긴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오랜 전쟁에 지친 양국은 화의를 맺고, 1270년 마침내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삼별초는 개경으로 오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전을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서 많은 사
욱면(郁面)은 신라의 여성 노비이다. ‘삼국유사’에는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계집종[婢]인 욱면이 염불을 통해 극락에 왕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욱면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감통(感通)편의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조와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에서 전한다.
삼국유사 향전에 따르면, 욱면은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景德王·
광덕(廣德)의 처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대의 여성이다. ‘삼국유사’ 감통(感通)편의 광덕엄장(廣德嚴莊) 조에 나온다. 광덕은 친구인 엄장과 함께 부처님이 계시는 나라인 불국토(佛國土), 즉 서방세계(西方世界)에 가기 위해 수행하던 사문(沙門), 즉 중이었다. 엄장과 달리 광덕에게는 아내와 자식[妻子]이 있었다. 광덕과 엄장은 먼저 성
벽화(碧花)는 신라의 여성으로, 아버지는 파로(波路)이다. 벽화는 신라 제21대 왕인 소지왕(炤知王·재위 479∼500) 대의 인물이다. ‘삼국사기’에는 파로가 딸 벽화를 소지왕에게 바친 일화가 나온다. 소지왕은 비처왕(毗處王)이라고도 하였는데,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소지왕이 재위 22년(500) 가을 9월에 날이군(捺已郡·현재 경북 영주)에 행차하였다.
전밀라(全密羅)는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목사이다. 1908년 충북 덕산에서 아버지 전연득(全軟得)과 어머니 최마리아의 5남매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12살에 충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공주의 명문 영명(永明)여고보에 입학했다. 당시 집안이 어려운 여학생들은 바느질이나 수를 놓는 일을 하며 고학을 했다. 전밀라는 선교사 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교장은 ‘
이소선(李小仙)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개혁에 앞장선 운동가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全泰壹)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1929년 경북 달성군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일제에 끌려갔다가 사망했다. 이소선은 어머니가 재혼한 뒤 의붓아버지의 구박을 받으며 어렵게 살
이난영(李蘭影·본명 이옥례(李玉禮))은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의 심금을 울린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로 유명하다. 1916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고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6세 무렵 태양극단(太陽劇團)에 입단하면서부터 가수 활동을 했다. 이난영이라는 예명은 극단 단장 박승희(朴勝喜)가 지어주었다. 극단을 따라 다니며 주로 막간 공연을 했고, 태평레
오엽주(吳葉舟)는 조선인 미용사로서 처음으로 1933년 화신(和信)백화점에 미용실을 개업한 여성이다. 조선인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905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한 오엽주는 평양의 남산보통학교와 서문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경성 여자미용원에서 6개월 과정을 수료했고, 그 이듬해 일본에 가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문예봉(文藝峯·본명 문정원(文丁元))은 일제강점기 ‘삼천만의 연인’으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여배우다. 191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문수일(文秀一)은 극단 연극시장(演劇市場)의 대표로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였다.
문예봉은 13세 무렵 배우 양성소에 들어가 수업을 받은 뒤 아버지가 이끌던 극단의 무대에 올랐다. 14세에
김학순(金學順)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여성이다. 그녀의 증언은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와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학순은 1924년 만주 지린(吉林)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학순이 백일도 되기 전에 사망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을 데리고 평양에 돌아와 살다가 재혼했다. 김학순은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지자 14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이 살다 간 16세기는 ‘조선’적인 문화가 막 꽃핀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공론을 중시한 사림(士林)의 시대이며 문화적으로는 한글이 지식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이황은 ‘도산십이곡’을,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정철은 ‘관동별곡’ 등을 한글로 지었다. 이 속에서 사임당은 강릉, 봉평, 서울에 살면서 그림으로 당대 이름을 떨쳤다
1809년(순조 9) 조선 사회에서는 여성이 쓴 기념비적인 전문서 한 권이 등장했다. 바로 이빙허각(李憑虛閣·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였다.
규합은 여성이 머무는 거처 또는 여성을 의미하므로 규합총서를 풀이하면 가정학 총서가 된다. 그런데 당시 의식주에 대한 탐구는 여성이기에 갖는 관심이 아니었다. 성리학에서 출발해 실용 학문으로 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