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방글라데시판 ‘음서제’의 교훈

입력 2024-08-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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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 국제경제부장 baejh94@

기회평등 저버린 공무원 할당제
‘노력하면 보상’ 서민희망 앗아가
우리도 청년실업 심각성 깨닫길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까지 권좌에서 쫓겨나게 만든 최근 방글라데시의 혼란을 보면 고려와 조선 시대 ‘음서제’가 떠오른다. 음서는 5품 이상 고위 관리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의 자손에게 과거를 보지 않아도 관직을 내려주는 제도인데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사태가 딱 이것과 비슷한 취지의 공무원 할당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글라데시 다카 고등법원이 6월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공직 할당제 부활을 허용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방글라데시에서 공무원은 안정성은 물론 월급도 사기업보다 높고 각종 복지혜택과 더불어 뇌물까지 챙길 수 있어서 ‘꿈의 직장’으로 불린다. 이에 매년 대학을 졸업하는 50만에서 60만 명에 이르는 대학생이 1000개가 채 되지 않는 공무원 일자리를 놓고 피 터지는 경쟁을 벌여왔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관리, 즉 공무원이 되는 것만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유일한 길이었는데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방글라데시에서 이미 사회 상류층을 이루고 있는 독립유공자들에게 국민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공무원 일자리 대부분을 주겠다고 하니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심지어 이런 공무원 할당제는 우리나라의 음서제보다 못한 면이 있다. 음서로 관리가 된 사람은 아무리 집안이 좋아도 멸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관직에 오른 뒤에도 다시 과거를 치르는 경우가 흔했다.

반면 방글라데시는 이렇게 특권을 받고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부귀영화를 자손 대대로 누릴 수 있으니 아무리 독립투사의 후손이라고 해도 서민이 좌절하고 크게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다.

방글라데시가 우리와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공무원 할당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이번 사태는 분명 많은 교훈을 준다. 정책입안자들이 방글라데시를 반면교사 삼아 ‘기회의 평등’이라는 단어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이를 실현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또 섬세하게 고민하기를 바란다.

방글라데시에서 정권 타도를 외쳤던 수많은 젊은이가 단순히 시위로 할당제가 없어지면 자신도 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기대로 거리에 나갔겠는가. 할당제 폐지 이후에도 여전히 이들 젊은이 중 압도적인 다수는 공무원이 되지 못하고 힘겹게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좁은 문이라도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송두리째 꺾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의도가 좋고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정책이라면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또 다른 세계 각국 청년들도 방글라데시만큼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있다. 한국은 일도 구직활동도 하지 않고 그냥 노는 청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이런 20대 인구가 44만 명을 넘어 7월 기준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중국은 명문대를 나와도 대학원을 제외한 실질 취업률이 20%도 안 된다. 소셜미디어(SNS)에서는 취직을 못 하고 노점상을 하거나 일용직 근로자로 나서면서 간신히 먹고 살며 눈물을 흘리는 청년들의 사연이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영국에서 일어난 반이민 폭력 시위의 배경 중 하나로 청년실업이 꼽히고 있다.

이렇게 문제는 심각하지만, 세계 각국 정부가 펼치는 정책을 보면 마치 청년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만 같다. 방글라데시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고 중국도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했던 정보기술(IT)과 사교육 분야 등에서의 민간기업을 규제로 질식시키는 등 만만치 않다.

이제는 ‘청년 사다리 걷어차기’를 그만두고 이들을 보듬을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모두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baejh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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