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컷] 언론의 역할에 관한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입력 2024-11-0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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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틸컷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틸컷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6일 국내 개봉한 다큐멘터리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에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피해가 적나라한 이미지로 나열돼 있다. 마리우폴은 우크라이나의 항구 도시로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로 가는 유일한 육로다. 마리우폴이 전쟁의 주요 격전지가 된 이유다.

마리우폴 시민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다가, 그냥 집에 가만히 있다가 무참히 죽어 나갔다. 한 어머니는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18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잃었다. 죽은 아들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앞모습과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의 황망한 뒷모습이 스크린에 핏물처럼 맺혀있다.

슬픔과 애도의 시간마저 상실된 인간과 참혹한 도시의 이미지. 이 모든 상황이 AP 취재팀의 카메라에 담겨 있다. 이들이 찍은 영상은 전 세계 뉴스로 퍼져나갔다. “마리우폴에 아기 시체들이 묻힌 참호가 있다. AP 기자들이 취재했다”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바실리 네벤자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가짜 뉴스가 많다”라며 인상을 쓴다. 버젓이 영상으로 기록된 사실마저 가짜 뉴스가 되는 기막힌 상황이다.

AP 기자들은 마리우폴에 남은 마지막 언론인들이었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과 부서지는 도시의 풍경을 치열하게 기록했다. 그 과정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다. 그들은 일부 시민들로부터 “집도, 전 재산도 버리고 왔다. 대체 뭘 찍느냐?”는 핀잔을 듣고, ‘기레기’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민들을 계속 촬영해야 할지, 멈추고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는 취재팀의 고뇌가 영화의 저류에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팀은 이 현실을 사실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것이 기자의 의무이자 직업윤리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틸컷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틸컷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기자는 질문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 기록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질문과 기록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은 원래 불편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전쟁 다큐멘터리이지만, 가짜 뉴스가 판치는 오늘날 진정한 언론은 무엇인지 질문하는 또 다른 언론이기도 하다. 영화가 그 자체로 거대한 질문이며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수상작이다. 감독을 맡은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AP 영상기자는 수상 소감에서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기록하고, 진실이 널리게 퍼지게 하며, 마리우폴의 시민들과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잊히지 않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AP 취재팀이 생환했기 때문에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의 협력 덕분이다. 의사들은 취재팀이 러시아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흰 수술복을 나눠주었다. 군인들은 취재팀이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퇴로를 엄호했다. 일부 시민들은 기자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취재팀에게 “이 혼란을 찍어서 전 세계에 보내주세요”라고 간청했다.

20일의 시간 동안 취재팀이 손에 들었던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전쟁을 종식하고, 세상을 바꿀지도 모를 진실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 이미지 안에 우크라이나인들의 피와 눈물이 있고, 그 이미지 밖에 취재팀의 땀과 노력이 있다. 카메라를 잡은 사람과 앵글 안에 있는 사람 사이의 부단한 길항작용. 좋은 다큐멘터리영화의 미덕이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보도 역시 기자와 시민들의 신뢰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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