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인간 본성의 일부다. 우리의 뇌는 언제라도 사랑의 충동, 욕구, 갈망의 실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어떤 생물학자는 우리의 뇌와 본성이 성적 충동에 끌리는 생화학적 구조를 가졌다고 말한다. 인간 군집사회에서 사랑은 자연스러운 욕구로 여겨진다. 거기에 더해서 사랑의 원천 기술은 사회를 통합하는 문화적 규범으로 반복 학습을 통해 전수받는다. 그렇게 사랑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한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는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사랑하지 않는가? 사랑은 나 아닌 매혹을 머금은 타자에게 가 닿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다. 아울러 사랑은 타자에게 이타적으로 나를 증여하는 행위다.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를 아낌없이 주고받는다. 사랑은 혼자 추는 춤이 아니다. 사랑은 한 무대에서 둘이 추는 춤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 “둘의 무대”(‘사랑 예찬’, 조재룡 옮김, 도서출판 길, 2010)라고 정의한다. 사랑은 애틋하고 아끼는 순수한 마음으로 연민과 감각적 쾌락을 맛볼 기회다. 사랑의 실존에서는 어떤 놀라운 사태가 나타나는가?
사랑의 정동은 당사자들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며들며 호르몬의 변화를 일으킨다. 사랑하는 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마주 바라보며 상대의 몸을 쓰다듬을 때 옥시토신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한다. 포옹하고 애무할 때 분비되는 옥시토신 호르몬은 행복감을 드높인다고 알려져 있다. 사랑은 고양된 채로 승화된 욕망, 유토피아에의 약속, 낭만과 광기로 버무려진 상태, 자기 아닌 것으로의 도피 욕구일 테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그 주체에게 참된 삶을 살고 있다는 실감과 함께 행복감을 안겨준다. 사람은 사랑을 겪으면서 비로소 행복이라는 정동을 겪는다.
사랑은 어마어마한 기쁨을 동반하는 에로스적 경험 일반을 끌어안는다. 사랑의 시작은 유혹과 에로틱한 욕망의 향연을 예고한다. 이 향연은 덧없음이라는 재앙으로 막을 내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파국을 맞이하며 몸서리를 친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사랑이 품은 부정성을 겪는다. 사랑은 이타적이면서 동시에 이기적인 욕망의 작동 속에서 단단해진다. 사랑을 떠받치는 것은 연민과 증오라는 모순된 두 축이다. 어느 때는 연민이 크게 작동하고, 다른 어느 때는 증오가 더 크게 작동한다. 사랑에서 연유한 증오와 혐오, 지족한 환멸성에서 촉발된 결의들이 폭발한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 나는 살면서 배신당한 사랑에 치를 떨며 사랑 자체를 증오하는 자들을 많이 보았다. 사랑은 분명히 모순과 복잡함을 품고 있으며, 예측 불가능한 데가 있다. 사랑에 상처받은 자들이 내뱉는 증오와 환멸의 말들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지구에서 거둔 번성의 동력은 사랑이다. 이것은 인류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했듯이 “지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별의 지옥”이고, “우리의 삶은 그 별에서 저주받은 이들이 지은 죄 때문에 받는 형벌”(조르조 아감벤,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 윤병언 옮김, 크리티카, 2023)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구에서 겪는 사랑도 형벌의 일종이 아닐까? 사랑 역시 호모 사피엔스가 누리는 번성 가운데 하나다. 안타깝게도 사랑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완전하게 충족시키는 법이 없다.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사랑은 끝난다. 끝나지 않는 사랑, 불멸의 사랑은 없다. 애달파라, 사랑은, 해도 해도 배가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