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응원봉에, 선결제 커피까지…'집회 문화', 이렇게 달라졌다 [이슈크래커]

입력 2024-12-0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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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X @Muffin__0819)
▲(출처=X @Muffin__0819)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K팝 팬이라면 한 번쯤 흥얼거려봤을 그룹 소녀시대의 명곡,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입니다.

2007년 발매된 소녀시대의 데뷔 싱글이지만 예쁜 한글 가사, 벅차오르는 분위기, 세련된 편곡까지 더해져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랑받는 노래인데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경연곡으로 꼭 꼽히곤 하는 가요계 '교과서'와도 같습니다.

이 노래가 무대 위가 아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및 해제 이후 연일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집회 참가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다만세'를 부른 건데요. '다만세'뿐 아니라 K팝 팬이라면 가사를 줄줄이 외울 법한 명곡들이 거리를 채웠습니다. 아이돌 그룹 콘서트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떼창'이 나오는가 하면 '응원봉'까지 곳곳에서 포착돼 눈길을 끌었죠.

젊은 세대까지 집회에 참여하면서 집회 문화에도 변화가 찾아왔다는 분석이 나오는데요. 주요 외신에도 K팝 떼창과 응원봉이 집회의 새로운 '변화'로 소개되는 등 높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촉구 집회에 시민들이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참석했다. (출처=독자 제공)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촉구 집회에 시민들이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참석했다. (출처=독자 제공)

응원봉 들고 뛰쳐나온 MZ세대…히트곡 부르며 "대통령 퇴진" 외쳐

3일 밤, 전 세계의 시선이 한국에 쏠렸습니다. 윤 대통령이 밤 10시 23분께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따른 것인데요. 한국에 마지막으로 선포됐던 비상계엄은 45년 전, 군사정권 때였기에 이를 가짜뉴스로 치부하고 "장난치지 마라"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이들도 있었죠.

국회 절차를 거쳐 약 6시간 만에 윤 대통령이 다시 계엄을 해제했지만, 계엄군의 국회 진입 과정 등 모습이 사진과 영상으로 속속 공개되면서 국민의 불안감은 드높아졌습니다. 이 불안감은 이내 '탄핵' 여론에 불을 붙였고, 곳곳에서 목소리가 높아졌죠. 정치권은 물론 법조계, 종교단체, 문화예술계 등 시민 사회의 여론이 들끓었고 대학가에선 시국 선언이 잇따랐습니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에도 불이 붙었습니다. 서울 여의도는 물론 광화문, 강원도 원주와 강릉, 부산 서면,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집회가 이어졌는데요. 특히 여의도에서 열린 집회엔 탄핵 표결이 열린 7일 대규모 인파가 몰렸습니다. 당초 경찰에 접수된 집회 신고 인원은 20만 명이었는데요. 주최 측 추산 100만 명, 경찰 추산(비공식) 15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자리했죠.

인스타그램과 X 등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현장 사진이 잇따라 올라왔습니다. 빼곡한 인파 사이론 '아이돌 응원봉'이 유독 눈길을 끌었는데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집회의 상징이었던 촛불 대신 응원봉을 드는 문화가 확산한 겁니다. 소녀시대부터 빅뱅, 샤이니, 인피니트, 아이유, 엑소, 방탄소년단(BTS), 세븐틴, 여자친구, 레드벨벳, 블랙핑크, NCT, 에스파, 아이브, 플레이브, 뉴진스, 보이넥스트도어, 라이즈 등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아이돌 가수의 응원봉이 포착됐죠.

응원봉은 촛불과 달리 바람에 꺼지지 않고, 화재나 화상 등 사고 위험도 적습니다. 애초에 콘서트장 등에서 장시간 들고 응원하는 게 목적이라 발광력도 뛰어나고 휴대도 간편하죠. 끝부분에 달려 있는 스트랩에 손목을 끼워 넣으면 떨어뜨릴 걱정도 없습니다.

이들은 현장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대통령 퇴진" 등 구호를 외치다가도 K팝 히트곡 메들리(?) 열창에 나섰는데요. 소녀시대의 '다만세'를 비롯해 god의 '촛불 하나', 샤이니 '링딩동', 지드래곤 '삐딱하게', 세븐틴 유닛 부석순 '파이팅 해야지', NCT 드림의 '캔디', 에스파 '위플래시' 등 수많은 히트곡이 떼창을 통해 거리에 울려 퍼졌습니다. 적지 않은 집회 참석자들이 화음까지 넣으면서(?)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죠.

▲가수 고 김민기. (연합뉴스)
▲가수 고 김민기. (연합뉴스)

가요는 어떻게 시위 현장으로 흘러들었나

학생 운동과 시민 운동의 세대라면, 민중가요는 익숙할 겁니다.

노동, 인권, 정치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불리는 노래를 뜻하는 민중가요는 1970~1980년대엔 주로 독재 타도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담곤 했습니다. 1980년 후반부턴 노동으로 주요 의제가 바뀌었는데, 엄숙하면서도 진지한 분위기는 여전히 이어졌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탄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번 집회에서도 울려 퍼졌고요. 1989년 발매된 '단결투쟁가'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사회 비판과 단결의 의지를 담아 만들어진 민중가요도 있지만, 사회 흐름에 의해 민중가요로 재해석된 노래도 숱합니다. 고(故)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대표적인데요. 애초 노래가 등장했을 땐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으면서 서정적인 노랫말과 멜로디로 화제를 빚었지만, 유신 정권은 추후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정했습니다.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는 이유였는데요. '묘지'는 민주항쟁으로 세상을 떠난 이를, '태양'은 새 시대를 의미한다고 해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꽃 피우는 아이', '상록수' 등 고인이 쓴 노래 대부분은 '운동권 가요'로 불리며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가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에야 해금됐죠.

'다만세'도 애초 '민중가요'로 탄생한 건 아니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집회 현장에 등장했습니다. 2016년 이화여대 학생들은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 등에 반대하며 본관 점거 농성을 진행한 바 있는데요. 이들 앞에 1600명가량의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학생들은 경찰과 대치 상황에서 소녀시대의 '다만세'를 제창해 큰 화제를 빚었죠. 당시 SNS에 공개된 영상 속에서 학생들은 무서운 상황 속 이 노래를 부르며 서로 의지했다고 밝혔습니다. 순수하면서도 의지가 가득 담긴 가사, 밝고 경쾌한 멜로디, K팝 팬이라면 흥얼거릴 수 있는 익숙함 덕분에 농성 현장의 노래로 '채택'된 거죠.

이후로도 '다만세'의 인기(?)는 이어졌습니다. 같은 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에서도, 이번 여의도 집회에서도 어김없이 울려 퍼지면서요.

(출처=X, 인스타그램,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출처=X, 인스타그램,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이색 깃발에 선결제도…외신도 조명한 집회 현장의 '변화'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개성을 중시하는 MZ세대의 특성, 여기에 보편화된 K팝 문화가 이번 집회의 변화를 이끌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먼저 응원봉 문화는 차별화, 동시에 연대에 중점을 둡니다.

응원봉이 탄생하기 전, 1세대 아이돌 팬들은 공식 색깔로 가수와 팬덤을 지칭했습니다. H.O.T. 팬들은 흰색 풍선을, 젝스키스 팬들은 노란색 풍선을 들고 공연장에 출동했던 이유입니다. 이후 색색으로 빛나는 야광봉을 거쳐 빅뱅 때쯤 공식 응원봉(뱅봉)이 탄생했는데요. 이후로 응원봉은 타 팬덤 사이에서 '우리 팬덤, 우리 가수'를 뜻하는 차별화 도구가, 또 팬덤끼리 똘똘 뭉치는 연대의 도구가 돼줬죠.

실제 이번 집회에서도 응원봉이 적지 않은 소속감을 줬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지엔 현장에서 모르는 사람과 함께 찍은 응원봉 인증샷이 쇄도했는데요. 이들은 입을 모아 K팝 팬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유대감을 쌓고 서로 의지, 응원하며 추위를 견뎠다고 전했습니다. 한 네티즌은 "응원봉은 아이돌 팬들에겐 안정감을 준다"며 "노조 깃발 아래 노조원들이 모이듯 응원봉 옆에 팬들이 함께하면서 두려움과 긴장감을 떨쳐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칫 과열될 수 있는 현장 분위기를 상쇄한 것도 응원봉이었습니다. 응원봉이 팬덤을, 또 가수를 상징하는 물품이다 보니 '내 가수 얼굴에 먹칠할 수 없다'는 취지였는데요. 많은 이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고, 쓰레기를 주우면서 뒷정리까지 마친 겁니다.

집회의 새로운 모습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 정치 성향이나 진영을 유추할 수 있는 깃발이 아닌, '저게 대체 어느 단체의 깃발이냐' 의문을 표할 만큼 의심스러운(?) 깃발이 다수 등장했는데요. 7일 여의도엔 '미국너구리연합 한국지부', '제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피크민 하는 시위 나온 사람들', '전국 소떡소떡 찌르기 연구협회', '연뮤극장지박령협회', '강아지발냄새연구회', '전국수족냉증연합', 'K-승질머리 연맹' 등 문자는 거창하지만 사실은 별 뜻 없는, '보통 사람들'을 의미하는 메시지를 담은 깃발이 한가득 휘날렸죠.

시민들이 이 같은 깃발을 들고나오기 시작한 건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가 시초입니다. 당시 촛불집회엔 '장수풍뎅이 연구회'가 뜬금없이(?) 등장해 웃음을 자아냈는데요. 그간 정치에 무관심했거나 뚜렷한 정치적 지향이 없었던 일반 시민들까지 촛불집회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까지 증명한 바 있습니다. 이후 유쾌하고 기발한 패러디가 잇따르면서 다양한 관심을 반영한 모임과 협회가 탄생했죠.

여기에 선결제 문화까지 더해졌습니다. 직접 집회 현장에 나가지 못한 이들은 집회 장소 인근 카페, 음식점 등에 일정 금액을 미리 결제해놓고 온라인상에 이를 알렸습니다. 누군가가 온라인상에 '어디에 선결제를 해놨으니, 집회 참가자들은 내 이름을 대고 음료와 음식을 먹으라'고 알리면 이 글을 보고 가서 이용하는 겁니다.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커피, 차, 김밥, 샌드위치 등 음식이 제일 많았고요. 약국에 선결제를 해놓은 시민도 있었습니다. 현장에선 핫팩, 간식을 나눠주는 시민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외신도 이번 집회에 주목했습니다. BBC는 "(여의도 집회) 주최 측이 K팝 노래를 틀자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형형색색의 야광봉을 흔들었다"며 "집회가 거리의 콘서트가 된 것 같았다"고 보도했고, 뉴욕타임스(NYT)도 "참가자들이 여당의 투표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는 동안 한 드러머 무리가 연주를 하고 있다"며 동영상을 올렸죠.

외신들도 조명한 새로운 집회 현장의 모습이지만, 사실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이 같은 변화는 젊은 세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 문화를 보여주지만, 그만큼 정치·사회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는 우려를 방증하기 때문이죠. K팝이라는 '문화'가 정치적 저항의 도구로 저변을 넓히면서(?), 사회적 참여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겁니다.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나온 이들은 "더 이상의 새로운 집회 문화가 등장할 일 없게 하라"고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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