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의 눈] ‘파묘’의 역설 ‘트라우마 거리두기’

입력 2024-04-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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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전문위원ㆍ언론학 박사

얼마 전, 고전을 겪고 있던 한국 영화계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영화 ‘파묘’의 누적 관객 수가 천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코로나 이후 좀처럼 회복되지 않던 국내 영화 극장에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일이다. 한국에서 꾸준히 인기가 있는 사회성이 짙은 드라마나 블록버스터도 아닌데 이토록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땅속에 파묻힌 무시무시한 존재, 그리고 그에 맞서 싸우는 신비롭고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은 한국의 관객들이 목말라하던 순수한 재미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순전히 재미만을 선사한다고 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상징과 코드를 통해 우리의 겉 의식, 그리고 거기서 한꺼풀 벗겨낸 속 의식에 잠자고 있던 공포와 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

일본에 대한 ‘악마화’와 ‘낭만화’ 이중성

한편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상징과 서사는 일제 강점기가 남긴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나가는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해방된 지 80년 가까이 되지만 그때 그 시절이 남긴 상처들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흐려지고만 있다. 땅속 깊숙이 박힌 쇠말뚝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교과서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만 일제 강점기에 대해 배웠다. 그렇다 보니 일본이라는 나라는 젊은이들에게 지나치게 ‘악마화’되기도, 때로는 지나치게 ‘낭만화’되기도 한다. 일본산 제품을 불매한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기의 서울을 테마로 한 식당이나 주점이 유행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양가적이고 극단적인 감정이 공존하는 이유는 그 누가 뭐라 해도, 일제 강점기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우리에게 뿌리 깊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악마화’와 ‘낭만화’ 모두 트라우마의 전형적인 방어기제이다. 몸에 상처가 생겼을 때 저절로 아물 듯이, 인간의 정신 또한 외상을 입었을 때 이를 빨리 극복하고 스스로의 기능을 정상화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자신에게 외상을 입힌 존재를 불가항력적으로 강하거나 악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이로써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자 하는 사고 과정은 인간의 생존 본능과 같다.

반대로 트라우마를 입힌 존재를 미화하거나 탐닉하기도 한다. 그러면 트라우마를 준 사건을 부정적인 경험이 아닌, 긍정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지속적인 성 학대를 받은 이들이 가해자의 행위를 사랑이나 보호로 정당화하는 아이러니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일부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사고 과정을 트라우마 치유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이라 보고 치료에 적극 이용하기도 한다.

자존감 회복해 합리적 한일관계 만들길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악마화’, ‘낭만화’ 모두 실체와 동떨어진 ‘망각’이라는 것이다. 이 망각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얻을 수 있는 성장을 저해하며 한 사람의 미래를 망칠 수도 있다. 여기서 이뤄져야 하는 치유의 다음 단계는 ‘거리두기’이다. 트라우마의 경험, 주체, 그리고 상처 입은 자신에게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방법이다. 이래야만 궁극적으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에게도 일본과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이러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충격요법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그 시절의 조선도 일본제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보다 훨씬 강성해진 대한민국과 예전보다는 못한 일본이 있을 뿐이다. 이런 건강한 자존감 회복을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 세대가 지구촌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본과 합리적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귀중한 미래 세대가 더 이상 500년 전의 도깨비 망령으로부터 쫓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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