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독서산책] 한국의 대표적 수필, 한 자리에

입력 2014-12-0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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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동 ‘한국수필의 미학’

“회전문 앞에 설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불확실성을 첨예하게 느끼곤 한다.” 염정임의 수필 ‘회전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다. 속도전으로 달려가는 시대에 수필을 읽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와 근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피천득은 ‘수필’의 가치를 이렇게 전한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다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다.”

이태동의 ‘한국수필의 미학’(문예출판사)은 한국의 대표적 수필을 한 데 모으고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해설을 더한 책이다. 이 책에는 피천득, 이상, 이양하, 박경리 등 쟁쟁한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실려 있는데, 중년 이후의 독자라면 피천득의 인연이나 이양하의 신록예찬을 다시 만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도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김춘수의 ‘베타니아의 봄’에는 색다른 글이 실려 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예수님이 자주 방문했던 나사로의 집이 있었다. 부지런한 누이가 마르다이고 게으른 누이가 마리아이다. 집에 손님이 많아질 때는 손이 아쉬워서 언니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를 나무라고 싶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마르다여, 마리아에게는 마리아의 몫이 있느니라!” 성경 속의 한 장면을 소개하면서 김춘수는 이런 해석을 더한다. “생산을 위한 노동만이 신성하고, 노동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성역을 형성한다. 예술이 이리하여 수단이 되고, 수단이 되지 않는 예술은 퇴폐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모든 것이 수단화될 수밖에 없는 시장 사회의 모습에 대한 문인의 단상이다.

이상옥의 ‘하느님 엿보기’라는 글은 독특하다. 그는 몇몇 종교에 의해 세속화된 신을 가지고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우주적 차원의 원리가 해명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가 신을 발견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소품들에서다. “이제는 거꾸로 풀 한 포기나 꽃 한 송이 같은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꼼꼼히 들여다볼 때마다 그 존재가 귀납적으로 증명된다. 다시 말하며, 내가 찾아다니는 꽃이나 열매 같은 하느님의 소품들이 제각기 소우주를 이룸으로써 대우주의 섭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생명체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발견한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애당초 거시적 우주론을 통해 엿보이기 시작하던 나의 하느님이 이제는 현실 세계에서 개개 사물을 통해 구체적 모습을 실증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따로 있을 수 있을까.”

김후란의 ‘꽃, 향기로운 대화’라는 작품에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들어 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삶의 행복에 대해 말한다. “인간이 동물의 차원을 떠나서 진정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데는 지성과 감성이 있기 때문이며, 정감에 좌우되는 삶의 빛깔과 무늬가 있는 때문이다. 거기에 자연과 예술이 주는 기쁨의 부피가 보태질 때 비로서 삶의 꿈틀거림이 살아 있는 보람에 연결된다. 꽃이 기여하는 바로 그런 면에서인 것이다.” 그녀는 또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 이런 게 있음으로써 살아가는 맛이 있고 살아가는 멋이 있다. 그런 기쁨을 안겨주는 최상의 선물이야말로 꽃이 아닌가 한다”고 말한다.

한가한 시간에 읽어볼 만한 대표적 수필들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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