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피란민 애환 서린 ‘국제시장’

입력 2014-12-26 14:33 수정 2014-12-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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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교열기자

갑오년이 저물어 간다. 청마의 기상을 품고 시작했건만 세 모녀 자살, 세월호 참사, 윤일병 구타 사망 사건 등 억울하고 처참한 죽음이 잇달아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어디 이뿐인가.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 엽기적 살인사건, 땅콩 회항 등 연말 분위기도 뒤숭숭하다. 소통 부재에 따른 갈등과 상생의 논리를 배우지 못한 자들로 인해 2014년은 어둠 속에 막을 내리고 있다. 새해를 맞는 마음 또한 미래를 한 치 앞도 예견할 수 없기에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해 온 아버지의 인생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연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는 1950년 흥남철수 이후 부산 국제시장에 정착해 서독 광부 파견, 베트남 파병, 이산가족 상봉 등 굵직한 시대 흐름의 중심에 선 주인공이 가족과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고비를 이겨내는 모습을 담아 냈다. 고난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리네 아버지와 너무도 닮았기에 많은 이들이 ‘국제시장’에 울고 웃는다.

영화의 중심배경인 부산은 해방·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 때 일본으로 징용됐던 사람들은 부산항으로 대거 귀국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중엔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란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유행가 ‘굳세어라 금순아’의 애환처럼 피란지에서의 외로움과 굶주림에 지쳐 영도다리에서 투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참화를 피해 부산으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도시이기에 부산은 언어, 먹거리 등 우리 문화가 비빔밥처럼 잘 섞인 곳이다. 당시 무엇보다 급한 건 입에 풀칠을 하는 일일 터. 피란민들은 입던 옷은 물론 미군 구호품, 군용품 등 돈이 된다면 뭐든 내다 팔았다. 좌판이 벌어진 곳엔 ‘케네디 시장’ ‘양키 시장’ ‘깡통 시장’ 등 별칭들이 붙었다. 특히 이북 피란민의 경우 시장에서의 견제 세력이 많아 ‘38따라지’(38선을 넘어온 빈털터리) 소리를 듣곤 했다. 60여년이 흐른 지금 부산은 피란민을 품은 도시답게 개방성을 토대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피난’, ‘피란’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두 단어는 뜻이 거의 같지만 구분해 써야 한다. ‘피난(避難)’은 한자어에서 보듯 재난을 피하여 멀리 옮겨 간다는 의미다. 지진·태풍·홍수·가뭄 등 주로 천재지변을 피하는 것으로 긴급피난, 피난처 등의 표현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반면 피란(避亂)은 전쟁이나 병란(兵亂) 등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간다는 뜻이다. 피란길·피란민·피란살이 등의 합성어가 있다. 즉, 화산 폭발로 집을 떠난 사람은 ‘피난민’이고, 이라크 전쟁으로 고향을 등진 이들은 ‘피란살이’를 한다고 표현해야 바르다.

많은 이들이 ‘피난’과 ‘피란’을 헷갈려 하는 데에는 국립국어원의 책임이 크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살펴보면 두 단어의 뜻풀이는 바르지만 적절치 못한 예문이 제시돼 있다. 바로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 속 문장이다. ‘국군은 제2, 제3 방어선을 돌파당한 채 서울로 밀려들었고 정부는 수원으로 피난해 버렸다.’ 문장 속 ‘피난’은 ‘피란’으로 고쳐 써야 한다.

흥남철수 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은 배에 있던 무기를 다 버리고 정원(60명)의 200배가 훨씬 넘는 1만4000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무사히 거제에 도착했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고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다. 아니 기적이다. 국내 민간연구소와 해외 투자은행(IB)들은 내년 우리 경제는 올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위기를 헤쳐 나간다면 기적은 또 일어날 것이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성실과 용기만큼 큰 힘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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