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가 입을 다물었다. 엔화 가치가 달러당 110엔대까지 치솟고, 닛케이225지수가 한때 5% 넘게 폭락하는 등 일본 금융시장이 예기치않은 마이너스 금리 후폭풍에 휘말리자 책임을 통감한 것으로 보인다.
구로다 총재는 12일(현지시간) 총리 관저를 방문해 아베 신조 총리와 긴급 회동을 가졌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두 사람은 일본은행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에 관한 생각이나 효과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화 내용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구로다 총재는 총리와 회담 후 기자들에게 “환율을 포함한 국제 금융시장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회담한 건 미국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설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작년 9월 25일 이후 4개월 반만이다. 그만큼 현재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일본 금융시장은 패닉 그 자체였다. 도쿄증시의 닛케이225지수는 심리적 지지선인 1만5000선이 붕괴됐다. 지수가 장중 1만5000선을 무너뜨린 건 지난 2014년 10월 21일 이후 약 1년 4개월 만이다. 일본이 휴장 중인 11일에 국제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가치가 한때 110엔대까지 치솟으면서 수출기업의 수지가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로 다양한 종목에 매도세가 유입됐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의 재닛 옐런 의장이 전날 의회 증언에서 “미국 경제에 하방 압력이 가해지면 금리인상 속도를 늦추는 게 바람직하다”고 언급하자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기에 대한 불안감에 안전자산인 엔에 매수세가 급격히 유입되며 엔화 가치를 끌어올렸다.
또한 주가 하락이 리스크 회피 심리에 불씨를 당기면서 안전자산인 일본 국채에 자금이 몰려 일본의 장기금리는 마이너스권에 진입했다. 이는 은행의 수익성 악화 우려를 키우며 관련 기업의 주가를 직격했다.
구로다 총재는 이날 아베 총리와의 회담에 앞서 중의원 재무 금융위원회 청문회에서 “마이너스 금리와 함께 양적·질적 금융완화는 소기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며 “향후 물가와 실물 경제에도 꾸준히 파급해 나갈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그는 최근 엔고와 주가 하락 등 불안정한 금융시장 움직임에 대해선 “펀더멘털에 반하는 과도한 움직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마이너스 금리 정책 도입은 금융시장의 동요가 기업과 국민의 심리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완만한 경기 회복이 계속된다는 메인 시나리오는 바꾸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직접적으로 국민 생활에 크게 마이너스가 된다고는 볼 수 없다”며 “마이너스 금리는 일본에서는 처음있는 일로, 취지 및 효과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싶다”는 의향도 나타냈다. 이어 그는 “필요하다면 추가 금융 완화를 포함해 주저없이 정책을 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구로다 총재는 엔화 환율 동향에 대해서는 “총리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환율 동향 자체에 대한 발언은 아끼고 싶다”고 언급하는데 그쳤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현재 국제 금융시장 혼란에 대해 일본을 비롯한 유럽, 미국 등 3대 중앙은행이 ‘불확실성’이라는 지뢰를 밟은 것이라며 중앙은행의 정책이 더이상 시장에서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연준은 작년 12월에 9년 반 만에 금리인상에 나선 반면 일본은행은 지난 1월 유럽중앙은행(ECB)에 이어 마이너스 금리 도입을 결정했다. 그러나 금융 정책의 방향성 차이와 마이너스 금리의 부작용으로 시장이 혼란에 빠지면서 경기를 좌우할법한 금융 정책이 통하지 않는 형국이다.
자산 가격은 이론적으로, 그 자체가 낳는 이익을 이자로 나눠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면 자산 가격 산정 자체가 어려워진다. 일본과 유럽의 마이너스 금리는 빚을 내 투자하는 사람을 늘려 경기를 호전시키는 게 목적이지만, 거기에 이르기도 전에 시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설명했다.
옐런 의장은 11일 의회 증언에서 연준 역시 마이너스 금리 도입 검토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금리를 인상한지 두 달도 안됐지만 세계 시장의 혼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완화 정책으로 시장에 확실한 메시지를 줬음에도 11일 미국 증시에서 다우지수는 254포인트나 빠졌다. 이는 마이너스 금리의 부정적인 영향을 시장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다.
시장에서는 마이너스 금리를 놓고 찬반양론으로 갈리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가 유럽에서 일본, 일본에서 미국으로 번지면 통화 약세 경쟁에 박차가 걸릴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경기 회복과 물가 안정을 위해선 필요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