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지금은 복기(復棋)할 때

입력 2016-04-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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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새삼 영화의 매력에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종로에 있던 작은 상영관(지금 안타깝게도 영화관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을 즐겨 찾곤 했는데, 그곳에선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유럽이나 남미 등지에서 제작된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했다. 덕분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모센 마크말바프의 ‘가베’를 보며 이란 영화의 품격과 깊이에 더해 영상미의 황홀함에 매혹되기도 했고, 로베르토 스나이더의 ‘투 크라임’을 보며 사랑과 증오와 복수를 다루는 멕시코 감독 특유의 손길을 통해 문화적 이질감을 넘어 플롯의 탄탄함과 해석의 신선함에 감탄하기도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일상화되지 않았던 때였기에, 영화 상영 시간을 미리 챙기는 것이 번거로웠던 나는, 발길 닿는 대로 원하는 시간에 영화관에 들어가 중간 이후부터 영화를 보곤 했다. 처음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은근한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예술영화 범주에 드는 경우라면 대부분 스토리의 결말이 궁금한 영화는 아니었기에, 뒷부분을 먼저 보고 난 후 다시 처음부터 영화를 보게 되더라도 재미가 반감되거나 몰입을 방해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영화 전반부에 결말을 암시하는 상징들이 곳곳에 깔려 있음을 감지한 후엔, 그들 상징의 미묘함과 절묘함에 무릎을 치던 기억이 슬며시 떠오른다.

요즘은 영화관에 가는 대신 철 지난 영화 잡지를 꺼내 들고 뒤적이는 버릇이 생겼다. 한데 이 역시도 뜻밖의 재미를 쏠쏠히 안겨준다. 영화관에서 이미 상영된 영화 관련 기사의 경우, 어떤 의도를 갖고 영화를 제작했는지 감독의 초심을 훔쳐보는 재미도 있고, 섬세한 필치로 예리하게 써 내려간 영화비평 전문가들의 평을 다시금 읽어보는 맛도 제법 신선하다.

제작 단계에선 별다른 기대를 받지 못했지만 의외로 평단의 호평과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 영화가 있는가 하면, 보란 듯이 팡파르를 울리며 요란하게 시작했건만 결과는 용두사미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성적표를 받아든 영화 이야기도 지금 읽어보면 의미가 남다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디뮤직의 싹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라는 새로운 정보를 얻는 기쁨도 있고, 한 시기를 풍미했던 TV 드라마를 주제로 혹독한 비평과 열렬한 찬사가 공존하는 것을 보며 우리네 삶엔 정답이 없기도 하고 많기도 함을 음미하는 맛도 나쁘지 않다. 정말 꼭 읽고 싶었으나 놓쳐버린 책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도 있고, 언젠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면 이번엔 필히 티켓을 예약하리라 싶은 연극과 뮤지컬에 동그라미를 해두는 즐거움도 있다.

이번 4·13 총선이 끝난 후 우연히 3월 29일자 일간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당시 일간지마다 여론조사를 인용하며 총선 결과를 예측하는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어느 신문도 새누리당이 제1당의 지위를 빼앗기리라 예상한 경우는 없었다. 선거가 끝난 후 새누리당의 패인을 분석하고 향후 정국을 전망하는 기사가 넘쳐났지만, 예측 실패에 대한 진솔한 반성 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웠음은 유감이다.

자칭 아마 5단의 바둑 실력을 자랑하던 오라버니를 생각할 때마다 익숙하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그건 오라버니가 바둑을 복기(復棋)하는 모습이었다. 바둑에 문외한이었던 나로선 자신이 두었던 수와 상대방이 두었던 수를 정확하게 기억해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는데, 복기할 때의 집중력과 진지함만큼은 내게도 가감없이 전달됐다. 오라버니가 복기에 몰두했던 이유, 그건 분명 자신의 실수 내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요, 상대방으로부터 한 수 배우고자 했던 절실함이었을 게다.

우리 정치권에도 복기(復棋)가 필요한 시점이다. 욕심을 깨끗이 비우고 국민의 눈높이에 서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다. 그리하노라면 무엇이 결정적 패착이었는지, 언제 악수(惡手)를 두었는지, 상대방이 둔 신의 한 수를 언제 놓치고 말았는지가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하수(下手)임을 말해 무엇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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