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일부일처제의 기원과 관련해서 페미니스트 사학자들로부터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일처제는 사유재산제의 출현과 더불어 등장했고, 부권(父權)의 강화야말로 모권(母權)의 역사적 패배를 의미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남성들은 결코 일부일처제를 원치 않았다는 사실에 착안한 페미니스트들은 일부일처제야말로 여성들이 얻어낸 전리품일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은 다소 과장일 테지만 평생을 한 여성에게 충성하겠다는 인식은 남성의 입장에선 전혀 달가울 것이 없는 대신, 자신의 아이가 행여 남의 자식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남성의 의식 깊숙이 잠재되어 있었음을 간파한 여성들이 남성을 상대로 협상에 들어갔으리란 것이다. ‘당신의 적자(嫡子)를 낳아줄 테니 당신은 평생 나의 안녕과 안전을 책임져 달라’는 거래가 성사되면서 일부일처제가 시작되었으리란 것이 페미니스트 사학자들의 추론이다.
한편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인식은 서구에서도 근대 이후 시작되었다. 전근대사회에서 결혼이란 가문의 정치적 권력을 확대하고 경제적 자산을 축적하는 중요한 의례였다. 누구와 결혼하느냐 여부가 가문의 중대사였던 만큼, 당사자들에게 의사 결정을 맡길 수 없었으리란 것이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낭만적 결혼관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배우자 선택은 가문의 중대사로부터 개인의 프라이버시로 전환되었다. 결과적으로 ‘사소한 일’로 전락(?)했고, 이후 결혼의 안정성 또한 심각한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혼의 토대가 당사자들 간 사랑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인식은 매우 획기적 아이디어였던 반면, 격렬한 비판과 심각한 반대에 직면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랑이란 매우 불안정하고 가변적이며 예측불가능한 감정일진대 이를 결혼의 토대로 삼을 경우 결혼은 필시 불안정성과 부도덕함의 나락으로 떨어지리란 경고가 이어졌다.
당시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여 결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오히려 불만족도 역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이혼율 급증이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이혼이 사랑을 상실하여 불행에 빠진 부부관계를 해소하는 통로가 됨으로써, 서구에선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결혼생활을 유지해가는 순차적 일부일처제(serial monogamy)가 규범이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이혼과 재혼의 반복이 과연 불행한 부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까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는데 정작 결혼을 하고 보니 사랑은 저만치 도망가 버리는 역설을 어찌해야 좋을지, 현대인의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결론인즉 ‘사랑이란 결혼을 통해 식는 것이 아니라 익는 것’이란 혜안이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가슴 떨리는 것’이 낭만적 사랑이요 열정적 사랑일진대, 이 사랑은 삶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다.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서 성숙해가야 마땅하거늘,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익숙함과 친숙함, 그리고 편안함 또한 성숙한 사랑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란 것이다.
조(粗)이혼율 50%를 넘나드는 시대에 백년해로하는 부부를 상대로 비결을 물은즉, 자신들 부부를 묶어주는 끈은 처음엔 사랑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서로를 향한 신뢰와 존경으로 승화되었다는 멋진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결혼의 안정성이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진 시대에 불안정하기 그지없고 쉽게 상처에 노출되는 ‘낭만적 사랑’에 지나치게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이야말로, 현대인의 딜레마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