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다. 마치 신기루(蜃氣樓)를 본 것 같다. 온통 골프코스다.
골프의 신천지 같은...누구를 위한 곳일까.
이제껏 돌아본 골프장과는 너무나 색다른 풍광이다. 해풍(海風)이 불어온다.
이곳은 현실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공격하고 방어하느라 애쓴 시간들이 해무(海霧)속으로 사라진다.
언제쯤 짐을 내려놓으려나.
아침 햇살이 싱그럽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것은 아직도 살만해서인가.
休(휴)...이것은 쉼이고, 휴...이것은 한 숨을 내쉬는
아름다운 날을 위한 변주곡(變奏曲)인가.
끝나지 않은 여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보슬비가 그린을 적시고 있다.
그대 가슴에 내리는 빗방울은 어느새 호수를 이루고
이내 넘치지 않을 만큼만 그린에 스며든다.
버킷리스트를 위해 새롭게 내딛는 발걸음
언제나 떠나도 좋은 그대와의 그린여행은 이렇게 시작 된다.
과연 180홀을 돌을 수 있을까. 이것이 궁금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떠나긴 했지만 걱정부터 앞섰다. 체력을 단련하느라 이를 앞두고 헬스를 시작했다. 4일간 180홀 플레이는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하는 강행군이 아닐 수 없었다. 마라톤 골프, ‘블록버스터 골프180’이다. 처음 친한 언니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 이왕 골프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특별한 경험이라 생각해 해보자고 결심했다.
중국 하이난도 하이커우(海口)에 자리 잡은 미션힐스 골프앤리조트. 10개 코스와 온천, 그리고 호텔을 보유하고 있다. 파72인 18홀 골프정규코스 8개와 파3홀 2개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파3홀도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정규 홀처럼 인정된다.
홀은 북쪽에 1, 2, 3, 4번 홀이 있고, 나머지 5~10번 홀은 남쪽에 있다. 북쪽은 호텔과 인접하고 있지만, 다른 홀들은 버스로 조금 이동한다.
4박6일 일정이다. 가는 날과 오는 날은 비행기내에서 잠을 청한다. 4일 동안 36홀, 54홀, 54홀, 36홀을 돈다. 서울에서 18홀만 라운드하던 것과는 무척 다를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몸이 말을 들을까. 스윙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것들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첫날은 새벽에 도착해 잠을 날밤을 새우고 바로 골프장으로 이동했다. 머리는 멍한 상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바로 라운드에 들어갔다. 10개 코스 중 3번인 빈티지 코스였다. 화산섬이라 현무암과 선인장, 나무들이 코스의 조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페어웨이와 그린관리가 예술이었다. 물론 잔디는 켄터키블루와 벤트글라스였다. 페어웨이 폭은 국내의 코스보다 1.5배 정도는 넓어 보였다. 그린은 조금 ‘뻥(?)’ 쳐서 축구장처럼 컸다. 어디로 치든지 OB(아웃 오브 바운스)가 날 염려가 없었다. 이는 8개 홀이 모두 비슷했다. 다만, 벙커와 워터해저드의 장애물을 요령 있게 피해야 좋은 스코어를 낼 수 있을 듯싶었다.
파3 홀 골프코스는 그린이 일반 그린에 3~4배는 큰데다가 원하는 대로 핀을 사용하라고 2개가 꽂혀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린 중간에 벙커를 만들고, 그 벙커 내에 둔덕을 만들어 잔디를 심어 놓던지 나무로 꾸민 것. 샌드 벙커의 특징은 모래 안에 여러 개의 새로운 섬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빈티지는 아기자기하고 조금은 생각을 갖고 플레이이해야 하는 홀들이 많았다. 잠을 설쳐서 그런지 비몽사몽간에 18홀을 끝내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어 6번째 코스인 메도우 링크스로 이동했다. 역시 링크스답게 페어웨이는 넓직했고, 갈대숲이 장관을 이뤘다. US오픈이 열렸던 코스에서 영감을 얻어 조성된 코스여서 그런지 쉬운 듯 하면서도 결코 공략하는데 녹록지가 않았다.
함께 라운드한 분들이 재미 있어서 그런지 첫날은 힘든지 모르고 무사히 홀을 돌았다. 한분은 이번 골프여행을 추천한 타범클럽 회장을 맡고 있는 언니이고 다른 두 분은 골프를 오랜 친 분들이어서 그런지 별로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서 스테핑 스톤(징검다리)홀을 돌았다. 파3로 구성됐지만 정규코스 이상으로 공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동카트를 이용해 캐디와 걸으면서 플레이하는 색다른 묘미를 주었다.
2번 코스로 이동하자 샌드벨트 트레일코스가 정겹게 우리를 맞았다. 이 코스는 호주풍을 그대로 살린 멋진 홀들로 구성돼 있었지만 코스공략이 결코 쉽지 않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페어웨이와 그린이 이색적인 자태를 뽐냈다.
이렇게 해서 90홀을 돌았다. 반환점을 찍은 셈이다. 피곤해도 기분 좋은 피곤함이었다.
이어 9번 코스 더 프리서브(The Preserve)가 이어졌다. 뜻처럼 페어웨이와 그린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자연지형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페어웨이를 놓치며 사실 스코어를 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동반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까다로운 코스였다. 정확성이 떨어지는 장타자는 지옥이었다. 맨땅과 선인장 아니면 들풀들로 가득 메워 놨으니까.
이어지는 8번 코스 파3 더블 핀. 태평양만한 그린에 핀이 두 개가 꽂혀 있었다. 원하는 것을 골라내 플레이를 하라는 것. 거리가 짧은 듯 쉬워보였으나 골퍼들에게 결코 편안함을 거부하게끔 그린의 굴곡과 스피드가 퍼팅 스트로크에 걸림돌이 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오전에 비가 내렸다. 해풍도 조금 불고. 따듯하던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 졌다. 갑작스러운 비 소식에 골프장 측에서 일회용 비옷을 준비해 줬다. 5번 코스 용암(熔岩)벌판인 라바 필즈로 향했다. 이 코스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코스로 길이가 다른 코스에 비해 1.5배 이상 긴 것 같았다. 파4홀은 레이디 티잉 그라운드에서도 2온이 쉽지가 않았다. 홀마다 세컨드 샷에서 우드를 들어야 했으니까. 게다가 벙커가 왜 이리 많은지. 볼이 떨어질 만한 자리에는 어김없이 벙커가 숨어 있었으니. 그러나 홀들은 인공미가 아닌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눈을 즐겁게 하는 심미성이 살아 있었다고나 할까.
시간이 흐르면서 약간 피곤이 몰려 왔다. 샷도 점차 무너졌다. 볼은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가지도 않았고, 뒤땅도 자주 나왔다. 162홀의 강행군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조금만 돌면 원하는 180홀이 된다. 어둠이 내리면서 우리팀은 2번 홀에서 대단원의 피날레를 맞았다. 벅찬 감동이 다가왔다.
떠나기 전에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국내에서 기껏해야 18홀을 도는데 180홀 이라니. 그런데 해냈다. “너, 정말 대단해.”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골프는 어떤 면에서 스코어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대장정을 마치면서 느낀 것은 ‘골프는 그 자체로도 얼마든지 가치가 있는 스포츠’임을 새롭게 알았다는 사실이다. 홀을 마치면서 깃대를 들고 인증 샷을 찰칵. 그런 뒤 미션힐스 측으로부터 인증서를 받았다. 이번 ‘블록버스터 180’에서 모두 54명이 도전해 12명만이 완주했다. 재미난 사실은 한 홀만 건너뛰어도, 혹은 돌지 못해도 인증서 발행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골퍼라면 죽기 전에 한번쯤 도전해 볼만 하지 않을까 싶다. 하이난도(중국)=이순복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