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세월 따라 변화하는 시험 답안지

입력 2018-12-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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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대학은 한창 학기말을 준비 중이다. 곧 학기말 시험이 시작될 텐데 벌써부터 개봉영화 기다리듯 학생들 답안지가 궁금해온다. ‘채점만 안 하면 교수는 할 만한 직업’이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학생들 답안지 채점은 스트레스가 제법 수반되는 작업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학창 시절, 전설처럼 구전(口傳)되던 이야기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의 모 교수님은 학생들 리포트를 채점할 때 분량이 많을수록 높은 점수를 주셨다고 한다. 당시는 200자 원고지에 직접 글씨를 써서 제출하던 시절이었기에 학생들은 리포트 중간에 소설을 베껴서 끼워 넣기도 했고, 누군가는 가족들을 동원해서 소설 두 권을 베꼈노라는 엽기적 이야기도 들렸었다. 하기야 모 교수님은 선풍기를 돌려 멀리 가는 답안지일수록 높은 점수를 주셨다는 ‘믿거나 말거나’급 전설도 있었으니, 모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요즘 학생들은 너나없이 자신이 받는 성적에 매우 민감하기에 혹시라도 성적 이의 신청을 해올 것에 대비해 교수들은 만반의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물론 교수도 사람인지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때도 있어 성적 정정은 흔한 일이긴 하지만, 요즘의 변화는 ‘성적을 조금만 올려주세요’ 보다 ‘성적을 조금만 내려달라’는 요구가 많다는 사실이다.

성적을 내려달라는 이유는 재수강 신청 요건 때문이다. C플러스 이하부터 재수강이 허용되기에 B마이너스를 받은 학생들 다수는 성적을 내려달라고 애원한다. ‘학점 포기제’를 시행하는 학교에서는 아예 학생들이 넉넉하게 학점을 이수한 후 성적이 낮은 과목부터 포기신청을 해서 평균 평점을 관리하기도 하는 세상이다.

이처럼 성적에 목매다는 학생들의 답안지도 세월 따라 신선한 변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1990년대 초반 강사 시절, 성 역할의 문화적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뉴기니아의 아라페시(Arapesh), 문두구머(Mundugumor), 챔불리(Chambuli) 3부족 사례를 들어 주었는데, 답안지엔 뉴기니아 대신 ‘6인 이하의 부족’이란 표현이 등장해서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있다. 미국 민주주의를 설명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토크빌의 이름을 ‘도깨비’로 받아 적었던 학생의 답안지도 두고두고 생각난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학생들 답안지에 이해 불가한 단어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멘붕, 대박으로부터 웃픈, 머리에 쥐나는, 폭풍간지를 거쳐, 갑분싸, 소확행, 뇌섹남, 광삭(光의 속도로 削除하다) 등등. 결국은 대학원생 조교의 도움을 받아 신세대 용어의 뜻을 알아내긴 했지만, 채점하는 입장에선 난감함을 거쳐 씁쓸함을 지나 황당하기까지 했다.

생경한 단어 못지않게 요즘 답안지엔 이모티콘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예상치 못했던 문제나 본인이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우는 모양의 이모티콘( )이나 ‘흑흑흑’ 의성어가 등장하고, 예상했던 문제나 잘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오면 ‘교수님 예상문제 적중’이란 메모와 함께 러브마크(♡)를 날려주기도 한다.

예전엔 답안지 끝자락에 ‘교수님 한 학기 동안 감사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류의 메시지를 주로 남겼다면, 요즘은 ‘글씨를 못 써서 죄송합니다’ ‘글씨가 날아다녀 잘 알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류의 메시지가 많아졌다. 시험 답안지 마지막에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남기고 ‘교수님! 채점하시다 의문이 생기면 이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남긴 경우는 정말 압권이었다.

40년 전 내가 대학생일 때도 A4 용지 두 배 크기의 누런색 줄친 답안지에 암기한 모든 걸 쏟아내는 기분으로 시험을 치르곤 했었는데, 누런색에서 하얀색으로 색깔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여전히 시험지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갑갑함이 밀려온다.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할 밀레니얼 세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테스트해야 할지 깊은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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