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의 범주는 정의하기에 따라 그 규모를 얼마든지 조정할수 있다. 요사이 보편적 복지라는 정치적 이슈를 앞세워 교육분야도 복지영역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은 전체 예산에서 복지 다음으로 규모가 큰 영역이다. 따라서 교육을 복지영역에 포함할 경우, 전체 예산 중에서 절반 가량이 복지예산이 된다. 이제 복지관련 예산이 국가예산의 핵심을 차지하므로, 복지정책 방향에 대한 기본철학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복지란 특정계층으로 정부가 소득을 이전시키는 특성이 많으므로, 예리한 눈으로 보지 않으면 낭비될 수밖에 없다. 복지예산은 국민부담에서 나오므로, 전체 국민부담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주인없는 돈이다.
반면 복지를 원하는 수많은 계층들은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노력한다. 주인없는 돈을 서로 가지려는 이해계층에 배분하는 방법은 쉽지 않다. 그래서 복지정책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철학이 없으면 목소리 큰 이해당사자의 요구에 쉽게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내년 복지예산의 기본방향을 ‘맞춤형 복지’로 설정했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복지정책의 방향을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로 이분화함에 따라 맞춤형 복지는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맞춤형 복지는 선별적 복지에 가깝다. 보편적 복지라는 정치권 논리에 치우치지 않아서 기본방향은 잘 잡았다. 맞춤형 복지는 생애주기별, 수혜대상별 복지서비스를 확충하자는 골격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정책초점은 소득수준에 따라 수혜대상을 선별하여야 한다.
복지는 세가지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빈곤층을 돕는 공공부조, 미래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강제적 보험인 사회보험, 모든 사회구성원이 필요하는 서비스이므로 소비를 장려하는 사회서비스다. 세가지 복지영역은 정책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서로 다른 시각으로 봐야한다. 그래서 복지정책이란 한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정책방향을 평가하면, 본질을 규명하지 못하고, 잘못된 정책방향을 잡을 위험성이 높다.
복지라는 용어는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흥분하게 만드는 묘약과 같다. 무언가 따뜻하게 느껴지고, 정부에게 신뢰를 보내면서 정부역할을 확대해 주기 바라는 마법의 용어이다. 마치 우리 국민에게 ‘통일’처럼, 거부할수 없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정치권에서 말하는 보편적 복지확대는 빈곤층을 위한 복지를 의미하지 않으며, 사회서비스다. 보육, 교육 등과 같이 사회구성원들이 일정수준 이상의 서비스를 소비해야 하나, 저소득층은 경제적 능력이 안되어 소비하지 못할 경우, 결국 사회적으로 짐이 된다. 영유아 시절에 보육시설에 맡길 경제적 능력이 없어 방치하면, 그 애는 절대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면서 성장할수 없게 되어 결과적으로 사회적 해를 끼칠수 있다.
그래서 소득이 낮은 계층에 대해서는 정부가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 사회서비스 정책의 골자이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이런 사회서비스를 모든 계층에게 무료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부자에게도 무료보육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게 옳은 방향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공짜는 모든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든다. 지난번 무료보육정책을 시행했을 때, 공짜 챙기지 못하면 사회열등생이 된 기분을 주어, 영유아를 가진 많은 전업주부들이 모두 공짜보육기관을 사용하게 했다. 정작 필요로 하는 취업여성은 맡길 곳이 없어 어려움을 가지는 폐단을 보았다.
국민세금이지만, 비용이 수반되는 사회서비스는 절대 공짜로 제공해서는 안된다. 가격을 가져야 사회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조절할수 있다.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소득이 있으면 그 가격을 지불하고서 이용한다. 이때 저소득층은 꼭 필요하지만 경제능력이 없어 사용하지 못할 때, 정부에서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서비스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선별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짜로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는 멋있는 용어와는 달리 경제적 낭비가 필연적이다.
복지정책의 바람직한 방향이란 어떤 종류의 복지를 어떤 소득계층에 제공하는가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막연히 ‘보편’이란 멋있는 말에 ‘복지’라는 가슴에 와 닿는 용어를 붙임으로써 사람들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묘약이 되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