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고 게다가 주부였다. 술도 잘 마시지 못했다. 그럼에도 남성 일색인 제조업계에서 연매출 1000억원대의 중견기업을 일궈 냈고, ‘미다스의 손’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여성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고, 여성이라서 불리했던 점은 하나하나 극복했다. 오로지 추진력 하나로 세상의 편견을 깨트린 그녀. 2008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선정한 ‘세계를 움직이는 50인의 여성’에 오른 한경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를 만났다.
한 대표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여성에게 창업 동기를 부여하는 원인은 비슷하다. 생활 속 불편함에서 아이디어를 찾고 누구보다 주부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기에 자신감 넘치게 시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줄줄이 문을 닫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여성’이기 때문이다.
한 대표 역시 이를 고민하며 해답을 찾아나갔다. ‘걸레에 막대를 붙이고 스팀 기능을 탑재하면 스팀청소기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 하나로 부러움을 샀던 5급 공무원직까지 과감히 포기했다. 하지만 최고의 아이디어가 있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창업 초기부터 많은 벽에 부딪혀야 했다.
우선 사업자금 신청에서부터 첩첩산중이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2002년 당시만 해도 여자가 사업을 한다는 건 정말 힘들었다”며 “정부 지원사업금을 신청했더니 남편의 사업 부도로 어쩔 수 없이 바지사장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며 겁을 주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5급 공무원 출신이라 신용도 높아 남들보다 쉬울 줄 알았는데 결국 여성이라는 벽이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며 “당시 담당자들은 진공청소기가 있는데 누가 스팀청소기를 사겠느냐, 기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도 없는 여자가 이런 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 등 모든 면에서 낙제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한 대표는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매일 해당 부서를 찾아가 담당자를 설득했다. 또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 제품의 70~80%의 구매자가 여성인데 왜 사업성을 평가하는 사람은 다 남자냐는 지적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과정을 수차례 거친 끝에 결국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이야 여성 리더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여성의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고 운신의 폭도 넓어졌지만,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차별과 선입관의 벽이 매우 높았다”며 “여자라는 이유로 오해를 받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납득할 수 없었고 서럽기까지 했다”고 회상했다.
◇여성의 장점은 활용하고 단점은 버려야= 스팀청소기가 한창 잘 팔리던 창업 2년차.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쳤다. 이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스팀청소기 구입 대금을 치르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던 유통업체에 스팀청소기 납품을 중단하자 이 업체 관계자가 “제품을 주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한 대표에게 손도끼로 협박과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한 대표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품 대금을 갚지 않는 이상 단 하나의 물건도 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버텼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날 밤 12시까지 붙잡혀 있었지만 끝내 물건을 내주지 않았고 당시의 결단 덕분에 지금 업계에서 가장 탄탄한 유통망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여성 대표이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고 그런 협박을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CEO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한 대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5년 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사람들의 무의식에 깔려 있는 ‘여자가 뭘 하겠어, 집에서 밥이나 하지’라는 부정적 인식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성 CEO의 대명사가 된 그녀는 포기보다는 모험에 나설 것을 권했다. 역설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
그는 “제품 개발 때 여성이기에 주부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제품에 녹여낼 수 있었다”며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성의 경쟁력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전 분야에 걸쳐 훌륭한 여성 리더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