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는 경쟁이란 틀 속에서만 만들어진다. 경쟁 없는 창조는 없으며, 그래서 경쟁은 창조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하이에크는 경쟁을 ‘발견적 절차’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곧 ‘창조를 위한 절차’이기도 하다. 정부가 창조를 소중한 국정철학으로 제시한다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인 경쟁도 소중한 가치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는 높이 사면서, 경쟁을 나쁘게 몰아치고 있다.
한국에서 경쟁은 나쁜 용어로 인식되어 있다. 경쟁을 비슷한 어감을 가진 전쟁으로 인식하고, 승자독식의 가진 자를 옹호하는 논리로 매도되고 있다. 승자와 패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으로 사회를 양극화시키는 나쁜 용어이다. 그래서 경쟁 앞에는 온갖 형태의 나쁜 수식어가 많다. 치열한 경쟁, 무한경쟁, 과당경쟁 등등.
그러나 경쟁 앞의 수식어는 경쟁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필요없는 말이다. 마치 ‘임신’이란 용어 앞에 ‘치열한 임신’, ‘과당 임신’과 같이 본질과 관계없는 수식어일 뿐이다. 임신은 임신일 뿐이지, 임신 앞에는 수식어가 필요없다.
경쟁도 마찬가지다. 경쟁이냐 아니냐지, 수식어는 경쟁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필요없다. 그런데 경쟁 앞에 붙는 수식어가 왜 많을까? 경쟁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경쟁을 나쁜 용어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창조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경쟁은 주어진 재화를 누가 먼저 선점하는가의 소비경쟁이 아니다. 경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창조하게 하는 생산 측면에서의 에너지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창조는 경쟁이 있기에 가능하다.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대표적인 우리 시대의 인물이다. 이들이 창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들보다 인류애가 많아서가 아니고,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일 뿐이다. 경쟁만이 창조적 인물이 창조할 수 있도록 만든다.
창조가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창조와 함께 경쟁의 가치를 일깨워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부는 창조는 강조하면서, 경쟁의 가치를 죽이고 있다. 국민이 좋게 느끼는 창조란 용어는 내세웠지만, 나쁜 용어로 각인된 경쟁과 격리시켜, 창조와 경쟁을 위한 정책수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경쟁의 가치를 훼손하는 대표적인 정치적 용어가 경제민주화다. 경쟁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대신, 대기업 혹은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규제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대기업의 불공정하며 부당한 거래행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거래는 복잡하므로 불공정행위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선 고도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한다. 경제현실은 건별로 복잡한데, 획일적으로 집행하는 제도로서 단순화해 버리면, 정당한 경제행위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경쟁없는 창조는 결국 정부 주도로 창조하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부는 절대 창조할 수 없으며, 정치적 수식어만 난무하게 되고, 창조로 한 건 하려는 관료들만 많아진다. 올해 한국경제는 2%대 경제성장률이 전망될 정도로 어둡다. 창조경제를 내세워 경제성장의 틀을 새롭게 짜려는 박근혜 정부의 철학은 이해하지만, 창조를 위해선 반드시 경쟁원칙을 지켜야 한다. 창조와 경쟁이 따로 가면, 절대 창조는 이루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