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한국의 역사 뮤지컬과 유럽의 역사 뮤지컬

입력 2016-08-1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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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뮤지컬산업연구소

올해 광복절의 대통령 경축사가 논란거리다. 안중근 의사가 유언을 남긴 마지막 순국 장소가 하얼빈 감옥이라고 대통령이 발언하자, 청와대는 뤼순 감옥으로 정정했다. 이런저런 여파 속에서 뮤지컬 종사자인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의 날에 창작뮤지컬 ‘영웅’을 관람했다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영웅’ 8장에는 아예 영상 자막과 함께 검사와 안중근 의사의 이런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대련관구 여순 형무소 제3사 9호 방 수감번호 26. 안중근. 나이는?” “31세.” “출신지는?” “대한제국 황해도 해주.” “직업은?” “대한제군 의병군 참모중장.”

대련관구 여순 형무소는 중국 다롄에 있는 뤼순 형무소다. 뤼순 형무소는 중국인들이 일본의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 고문 도구에 교수형장, 수의, 교수형을 당한 시신까지 그 흔적을 그대로 기념관처럼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죽은 수감자들을 무릎을 꿇린 채 둥근 목관(木棺)에 넣어 매장했다는데 죽어서라도 죽어서까지 일본을 향해 엎드리라는 의도였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달리한 신채호 선생을 비롯해 많은 대한독립투사들이 뤼순 형무소에서 고문당하고, 어두운 교수형 대기실을 거쳐 죽음을 맞고, 무릎까지 꿇린 채 매장당한 것이다.

한 지인의 아들은 뮤지컬 ‘영웅’을 보고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이토 히로부미 살인죄!”라는 검사의 대사에 안중근 의사가 “나는 대한제군 의병군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 중이므로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포로다”라고 항변하는 장면이라면서 일본과 우리의 과거사를 다시 공부하겠다고 눈을 반짝였다. 뮤지컬 한 편이 한 청소년의 역사관을 바꿨나 보다.

공연 한 편의 역할은 여러 가지다. 또 프로덕션의 목적에 따라 다 다르다. 뮤지컬은 대체로 흥행이 목적이다. 그런데 가끔씩 창작뮤지컬 ‘명성황후’, ‘영웅’을 제작한 윤호진 연출이나 ‘아리랑’을 제작한 박명성 프로듀서처럼 공연을 통해 우리 역사를 공유하고 되새기자는 제작자도 있다. 흥행만이 목적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모험이다. 한국의 역사나 고전을 다뤄 흥행에 성공한 공연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 관객들은 우리 역사를 그 시대 배경으로 다룬 무대를 촌스럽고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선입견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늘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 관객들이 유럽 왕실의 사극 뮤지컬에는 지나치게 열광한다는 점이다. ‘엘리자벳’, ‘루돌프’, ‘태양왕’ 등은 모두 남의 나라 옛날 공주와 왕자 이야기다. 물론 동유럽 역사 뮤지컬이 각광받는 몇 가지 요인은 인정한다. 첫째, 클래식 전통이 강한 기반다운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 살 만하고,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파란만장한 이야기 구조가 우리 정서에 딱 맞다. 그런 데다 동유럽 뮤지컬 프로덕션들은 브로드웨이와 달리 원작의 각색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유럽 뮤지컬은 우리나라에 라이선스 공연되는 과정에서 과감한 각색과 편곡, 심지어 새로운 작곡의 삽입까지 우리 관객들 입맛에 맞도록 고쳐졌다. 맛깔날 수밖에 없다. 한국 관객들은 왜 유럽의 사극 뮤지컬을 그토록 좋아하느냐고 묻는 중국과 미국의 뮤지컬 관련 지인들의 질문에 당혹해하는 건 나의 몫이다.

당혹스러운 해외 뮤지컬 전문가들의 질문이 한 가지 더 있다. 뮤지컬 ‘시 왓 아이 워너 시(See What I Wanna See)’를 쓰고 작곡한 브로드웨이의 실력파 작곡가인 마이클 존 라키우사를 초청해 ‘국제뮤지컬 워크숍’을 기획했을 때, 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면서 “한국 배우와 학생들은 지킬 앤 하이드의 ‘디스 이스 모멘트(This is moment)’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라고 재차 물었다. 텍스트로 삼을 전 세계의 뮤지컬 넘버는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의 실존 인물인 ‘사도세자’와 ‘3명의 헤이그 특사’를 뮤지컬을 통해 부활시켜 못 다한 말을 들어보고 싶은 꿈이 있다. 우리 문화계와 관객들의 취향과 선택이 공연의 완성도든, 흥행성이든, 주제든, 장르 실험이든 다양해지는 때를 기다리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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