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다니던 1970~80년대 수업을 마치면 친구들과 함께 동네 산으로 전단(傳單·삐라)을 찾으러 싸돌아다녔다. 주운 전단을 학교에 가져가면 공책, 연필, 크레파스 등을 상으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읽진 않았지만 붉은색 그림과 글씨 정도는 아직도 머릿속에 아스라이 남아 있다. 학용품이 귀하던 시절 강원도 산골 어린 초등학생에게 불온 선전물 ‘삐라’는 선물과 같은 존재였다. 나이 지긋한 세대의 추억 속 삐라가 요즘 뉴스의 중심이 되고 있다. 탈북자 등 우익 민간단체가 살포한 대북 전단이 남북관계의 걸림돌로 부상했다. 남북 간 총격전으로까지 치닫으면서 남북 고위급 접촉이 무산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아 다행이지만 남북관계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세계 최초의 삐라는 고대 이집트에서 도망친 노예를 잡아 달라며 거리에 뿌린 문서로,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한반도에 삐라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해방 직후다. 당시 좌우의 첨예한 이념 대립 속에 삐라는 세력 확산의 최대 도구인 동시에 정보 공유·소통의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후 한국전쟁 기간에도 삐라는 예외없이 등장했다. 심리전을 중시한 유엔군은 엄청난 양의 삐라를 공산군 진영에 뿌리며 귀순이나 항복을 권유했다. 이후 치열하게 이어진 남북 간 삐라 살포전은 2004년 남북회담에서 상호 비방을 중지키로 합의하면서 종료됐다. 그리고 삐라는 귀중한 사료로 강원도 고성과 정선의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상대방의 속을 긁어 불쾌하게 만드는 삐라는 이젠 정말 사라져야 할 것이다.
‘삐라’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전단(傳單)’의 잘못된 표현이며, 전단의 북한어로 올라 있다. 전단·광고·포스터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빌(bill)’을 일본인이 그들의 음운체계상 ‘비라(びら)’로 읽은 것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삐라’가 됐다. 1995년 당시 문화체육부가 광복 50돌을 기념해 ‘일본어투 생활용어 순화자료’를 고시하면서 이 말을 ‘전단’으로 바꿨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표현이라며 다시 ‘알림 쪽지’로 순화해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비슷한 의미의 ‘찌라시’도 일본어 ‘散(ち)らし’를 그대로 읽은 것으로 외래어 표기법상 ‘지라시’가 맞다. 이 또한 1995년 ‘선전지’, ‘낱장 광고’로 순화했다.
이에 비해 ‘술집이나 음식점에 고용돼 손님을 끌어들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삐끼’는 단어로 인정, 사전에 올랐다. 이 역시 일본어 ‘히키(引,ひき)’에서 온 말이다. 그러나 영어에 일본색이 덧칠해져 왜곡된 형태로 굳어진 삐라와 달리 삐끼는 본래 말 ‘히키’에서 파생해 새로운 단어로 굳어진 것으로 봐 올림말로 다룬 것이다.
최근 삐라가 뉴스의 초점이 되면서 단어 사용에 대한 전문가 의견이 팽팽하다. 규정을 바탕으로 버릴 건 버려야 한다는 입장과 이미 언중의 공감을 얻어 깊이 뿌리내린 말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교열기자인 나 역시 말 속에 녹아 있는 역사성을 배제한 채 국어연구원의 권장사항만을 따라야 할지 의문이 든다. 삐라는 삐라라고 불러야 의미가 정확히 전해지며 글맛이 제대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언중의 공감을 잃은 말은 의미가 없다. 우리말 다듬기의 방향이 명확히 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