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착하게 살자’며 ‘조폭’에서 탈퇴한 A는 배신자인가? 아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에 가깝다.
<2> 불로장생을 맹신하는 사교에서 빠져나와 고발한 B는? 역시 아니다. 내부 고발자이며 비정상의 정상화 사례라 할 수 있다.
<3> 적과 내통해 친구에 대한 치명적 정보를 넘긴 C는? 배신자, 맞다.
배신(背信)은 <3>처럼 신의나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다. 따라서 <1>의 조폭처럼 지켜줄 가치가 없는 대상이나 <2>의 불로장생같이 지킬 수 없는 목표를 맹신하는 경우 패거리에서 이탈해도 배신이라 할 수 없다. 주먹과 광신도들은 배신이라고 펄펄 뛰겠지만, 그들 패거리만의 주장일 뿐 사회적으로 폭넓게 인정받지 못한다.
'증세론 = 배신'의 허구
박근혜 대통령이 독한 말을 또 날렸다. 이번엔 ‘배신’이다. 박 대통령은 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경제활성화를 외면하고 세금을 더 걷자는 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여야 정치권을 중심으로 각계에서 봇물처럼 쏟아진 증세(增稅)와 복지 구조조정에 대한 논의를 정면으로 쏘아붙인 것이다. 핵심 공약인 ‘증세 없는 복지’를 계속 수성하겠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배신자로 찍히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현직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내린 배신의 저주를 그대로 맞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일까? 박 대통령의 작심 발언은 바로 통했다. 여권 내 배신의 양대 진원지로 비쳤던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가 다음 날인 10일 청와대 회동에서 박 대통령과의 일심동체를 강조했다. ‘증세 없는 복지는 거짓말’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던 김 대표는 “대통령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같다. 걱정하지 마시라. 새누리당이 경제살리기에 잘 협조하겠다”고 다짐했다. ‘비박’ 인사들이라 해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 신임 대표가 전일 “복지 구조조정은 없다”며 박근혜 정부와의 전면전을 선포한 상황에서 당과 청와대 간의 이견 해소는 피할 수 없는 세리머니였을 것이다.
그러면 박 대통령의 ‘증세론=배신’이란 등식은 정말 성립하는 것일까? 먼저 선악을 가르는 <1> 관문. 박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에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경제도 살리고 복지도 더 잘해 보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심오한 뜻’에 선(善)하고 공익적 진정성이 살아있는 만큼 합격이다.
가능성을 따지는 <2> 관문은 어떤가? 이게 문제다. ‘증세 없는 복지’는 무한동력 영구 엔진처럼 인류의 영원한 로망이자 신기루일 뿐이다. 국유재산처럼 이미 벌어놓은 재화를 팔거나 국채처럼 미래 세대에 빚을 떠넘기지 않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처 총리 시절 북해 유전처럼 대형 자원개발로 맛있는 뉴 머니가 마구 쏟아지거나 대통령 본인의 말처럼 ‘통일 대박’이 터지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운에 가깝다. 공약가계부까지 만들어 135조원의 복지 재원을 짜내기 위해 지난 2년간 나름 노력했지만 변변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국내외 상황을 봐선 남은 3년마저 기대난망이다.
질서있는 출구전략 모색할 때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은 경제활성화와 구조개혁에 더욱 공을 들이고 있다. 체질을 개선하고 경제가 살아나야 세수가 늘어나고 복지 지출 여력도 커진다는 점에서 당연한 정공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공법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 딴판이다. 지난해에만 무려 10조9000억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세수결손이 발생하는 등 3년 연속 세수에 펑크가 났다. 올해도 기업 실적이 좋지 않고, 소비도 가라앉아 있어 세수 결손과 재정적자가 구조적 고질병이 될 수도 있다. 반면 복지 관련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무상 보육 및 급식, 기초연금, 반값 등록금 예산은 2012년 14조원에서 27조원으로 배 가까이 급증했다. 곳간이 비어가는데 씀씀이만 커지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게다가 ‘증세 없는’이란 약속마저 사실상 지키지 못했다. 연말정산 개편, 담뱃값 인상 등은 ‘꼼수 증세’란 지탄을 받아야 했다. 이를 두고 야당은 국민과 서민 및 월급쟁이에 대한 ‘이중의 배신’이라고 역공을 퍼붓고 있다.
이제 분명해졌다. 실현성이 떨어지는 ‘증세 없는 복지’를 수정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국민적 대타협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질서 있는 출구 전략을 함께 고민할 때다. 무분별한 정쟁은 배를 또다시 산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