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박스권 등락을 반복하면서 원유 시장의 앞날이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는 가운데 장기적으로 ‘블랙스완’이 엄습할 것이라는 우려가 산유국 사이에 퍼지고 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3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전날보다 1.57달러(3.1%) 오른 배럴당 52.78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WTI는 장중 한때 배럴당 53.32달러까지 올랐다.
국제유가는 지난 6월 이후 60% 이상 하락했다. 60%가 빠지고 최근 1개월 새에 약 20%대 반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동안 많이 빠진 만큼 바닥권을 형성하고 올라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에 상승세에 투자하는 투자자도 늘어났다.
그러나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알리 알 나이미 석유장관은 이같은 시장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지난달 열린 회의에서 “우리가 모르는 블랙스완이 2050년경에 나타나 수요는 없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계속 높아질 것이라며 지금까지 공급 측에 집중됐던 시장의 관심을 뒤엎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주 세계의 석유 소비는 2020년까지 하루 660만 배럴의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IEA의 이같은 관측은 2014년 예상치에서 100만 배럴 낮아진 수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IEA의 새로운 전망치가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으나 현재 가격을 압박하고 있는 과잉 공급량이 150만 배럴임을 감안할 때 파급력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WSJ는 수요 내용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IEA는 3년 전 세계 수요가 2015~2017년에 하루 386만 배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중 79%는 이른바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국가와 중동의 수요였다. 그러나 최근 발표에 따르면 브릭스 국가의 수요는 63%로 떨어졌다.
IEA는 브릭스 국가들보다 미국의 역할이 더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8~2014년 IEA의 연례 중기 전망은 5년 간 미국에서의 소비가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미국의 수요가 2019년까지 하루 38만 배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경제가 회복되고 휘발유 값이 내리면 대형차를 선호하는 미국인들의 수요가 당연히 늘 것이라는 것.
이 같은 변화는 사우디 등 산유국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1달러당 석유 소비량(배럴)은 줄기 시작했으며 중국에서의 수요는 미국보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IEA의 최신 중기 전망에서 제시된 세계 수요의 연평균 증가율은 1.16%. 이는 2009년 이래 최저 수준이다.
원유 수요가 불투명해지면서 대형 정유업체조차 세계 원유 석유 수요 전망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엑손모빌은 2040년에는 세계 수요가 하루 약 1억1700만 배럴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엑손모빌은 2007년 시점에만 해도 세계 원유 수요가 이 수준이 되는 시점은 10년 빠른 2030년으로 예측했었다. 세계적인 정유사 엑손모빌의 예상조차 빗나간 셈이다.
WSJ는 전기자동차 수요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신흥국의 누구나가 대형 휘발유차를 갖게 된다는 과거의 예측도 근시안적인 발상이었다고 꼬집었다. 또한 캐나다의 오일샌드처럼 수십년에 걸친 유전개발계획은 손익분기점이 높기 때문에 수요 패턴이 변화하면 특히 무너지기 쉽다고 덧붙였다.
결국 사우디 석유장관이 말한 블랙스완은 지정학적, 환경적 문제로 인한 원유시장의 불확실성과 함께 산유국의 앞날을 한층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WSJ는 전했다. 따라서 산유국들은 무조건 현재의 정책을 고집하기 보다는 소비국들을 자극해 협조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블랙스완
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