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이름인 “팬지(Pansy)”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팬지는 원래 ‘사색’을 뜻하는 프랑스어 ‘팡세(Pense'e)’에서 유래됐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는 팬지의 꽃봉오리가 머리를 떨구고 골똘히 사색에 잠긴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런 독특한 꽃봉오리의 모양은 제비꽃류 식물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북유럽 시골 길가에서 보잘것없는 잡초로 피어나던 팬지의 원종(Viola tricolor)이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육종 과정을 통해 원예작물로 거듭 태어나게 됐다. 그 배경에는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과 연관된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들이 알려져 있다.
원래 야심만만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은 식물에 대한 흥미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식물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원예 작업이 취미였던 조세핀과 결혼하면서 식물 애호가로 변신하게 됐다. 특히 조세핀이 결혼식 때 지니고 있었던 제비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말년에 전쟁에서 패한 그는 지중해의 엘바섬에 유배됐으나 제비꽃이 활짝 피는 계절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나폴레옹과 당시 그의 추종자들은 제비꽃을 행운의 상징으로 여겼다고 한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팬지를 행운의 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팬지의 상업적인 육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가 아니라 적대국이었던 영국에서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팬지는 유럽의 수많은 문학작품에 등장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꽃이다. 또한 팬지의 꽃은 식용 가능하여 식재료로 사용하거나 요리를 장식하는 데 이용된다. 서양의 팬지와 같은 제비꽃과 제비꽃 속의 식물이 우리나라에도 다양하게 자생한다. 제비꽃을 비롯하여 무려 40여 종류가 전국적으로 자생한다.
자생 제비꽃은 이른 봄 논두렁, 밭두렁에서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식물이다. 높이 10㎝ 전후로 낮게 자라며 잎 사이에서 꽃대가 올라와 짙은 보라색 꽃이 핀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사색과 행운의 의미와는 달리 우리의 제비꽃은 서글픈 별명을 지니고 있다. 제비꽃 피는 따뜻한 봄이 오면 북방의 오랑캐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온다고 해 ‘오랑캐꽃’이라고도 부른다. 혹자는 꽃 모양이 오랑캐의 뒷머리 모습과 닮았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올 배고픔과 무자비한 오랑캐의 약탈을 앞두고 제비꽃을 바라보며 한없이 시름에 잠겼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제비꽃류의 종 다양성이 높은 나라이다. 잘 알려진 제비꽃뿐만 아니라 흰색, 노란색, 분홍색, 연보라색을 비롯해 심지어 여러 색깔이 섞여서 꽃이 피는 제비꽃 종류도 있다. 잎의 모양도 단순하지 않다. 둥근 모양, 심장 모양, 신장 모양, 깊게 갈라진 모양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졸방제비꽃, 단풍제비꽃, 각시제비꽃, 구름제비꽃, 낚시제비꽃, 고깔제비꽃 등 이름도 소박한 제비꽃 종류가 무려 50분류군에 이른다.
팬지는 야생종의 발굴과 지속적인 품종 개량에 의해 오늘날의 상업적 화훼작물로 성공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우리도 이제 한반도 전역의 방방곡곡에 지천으로 널린 자생 제비꽃들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 개발을 시도해야 한다. 다양한 자생 제비꽃류 가운데 일부 종은 굳이 번거로운 육종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관상가치가 높은 것도 있다. 또한 자생 제비꽃류에서 꽃의 크기나 화색과 같은 단순한 형질만이라도 개량한다 해도 품종으로서 충분히 세계 원예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 내년 봄에는 도시 화단이나 각종 조경 공간에 자생 제비꽃들이 식재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