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사람들은 봄날을 세나 보다. 구십춘광(九十春光)은 석 달 동안의 화창한 봄 날씨를 일컫는 말이다. 구춘(九春)이라고도 한다. 맹춘 중춘 계춘 구십일을 지나면 맹하(孟夏)로 넘어간다. 아쉬운 봄을 세다 보니 구십춘광은 아흔 살에도 봄빛처럼 건강한 모습을 뜻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됐다. 청춘을 사계여춘(四季如春)이라고 달리 말하는 것과 같다. 인생이 항상 봄과 같다면 얼마나 좋으랴.
청나라 시인 오석기(吳錫麒·1746~1814)의 ‘송춘’(送春)을 보자. 봄을 보내면 또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무상감이 가득하다. “떨어진 꽃잎, 솜 같은 버들은 안개 낀 강물 가득 흐르고/구십일 봄빛은 베틀의 북처럼 빨리도 가는구나/그 자취 해마다 어디서 찾을꼬/한 번 봄이 가면 한 번 더 백발이 느는데”[落花飛絮滿煙波 九十春光去如梭 ?跡年年何處覓 一回白髮一回多]
당 시인 진도(陳陶·812~888)의 ‘춘귀거’(春歸去)도 시상이 비슷하다. 첫 두 행에 “구십춘광은 이제 어디 있는가/옛사람 지금 사람 다 머물러 있지 못하네”[九十春光在何處 古人今人留不住]라고 했다.
지은이와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우리 규방가사 ‘화류가’(花柳歌)는 이렇게 시작된다. “화류간(花柳間)에 노든 벗님, 이내 말슴 들어 보소 구십춘광 덧업서, 장춘원(長春園)에 피는 꽃이, 지난밤 찬서리에, 하마 거의 이을러니, 이우러 떠러지면, 고은 색을 일흘로다. 관성자(管城予) 빗기 자바, 백화 방명로거 내니, 패강월 발근 달에, 선녀들도 하도만타”